온수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온수동은 조선 영조 대에 부평도호부 온수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온수리가 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에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온수리로, 1914년 3월 1일에는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온수리가 되었고, 1931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온수리가 되었으며, 1941년 10월 1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온수리,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온수동으로 변천되어 왔다. 오류출장소 관할에서는 폐지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수궁동사무소가 폐지되고, 온수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오류동사무소가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해 오류1동과 오류2동으로 분동될 때 온수동은 오류동 일부지역과 궁동과 함께 오류1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할 신설됨에 따라 자연히 구로구 관할이 되었고, 1988년 7월 1일에 분리하여 다시 수궁동을 설치함에 따라 수궁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온수동이라는 동명은 온수골에서 유래하였는데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 더운 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약 300년 전에 물이 나왔다고 하나 이는 막연한 전설인 것 같다. 세종실록에는 온수동의 온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했다. 임금께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서 찾아 보라고 했으나 그 곳 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으므로 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했다. (『世宗實錄』권83, 世宗 20년 11월 8일)
위의 기록으로 보아 피부병으로 일찍이 온양 등지로 온천욕을 다녀와 효험을 본 세종임금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온천할 곳을 찾기 위하여 지명이 온수(溫水)인 이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 온천을 탐색하도록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온천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문책으로 도호부를 현으로 강등시키고 말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그 곳 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단 온천수가 나오면 온천욕을 하기 위해 많은 피부병 환자들이 몰려들어 주민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또 넘쳐나온 온천수는 논에 극심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주민들이 온천수의 맥을 흙과 돌로 막아 버리고 물구멍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온천에 전 다리 모여들 듯", "온양온천에 헌다리모이 듯" 한다는 속담이 있음으로 보아 의술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과거에는 온천욕이 피부병 치료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따라서 온천이 나온다고 하면 많은 피부병 환자들이 몰려들게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왕이 다녀갈 정도로 소문이 난다면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몰려올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지의 주민들이 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온천수가 나온 것은 세종 대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후 온천의 개발은 일제시대 일인들이 1920년대에 온천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인들은 여기 저기 땅을 파면서 많은 경비만 투입한 채 수맥을 찾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에도 온천에 관한 관심은 여전하여 1969년과 1970년에도 온천시추작업을 하였으나 수맥을 찾지 못하였다. 1985년에도 새로운 장비로 시추작업을 하였으나 온천수를 개발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위치 및 연혁
구로구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온수동의 동쪽은 궁동과 접하고 있고, 그 경계선이 수궁동길을 지나 남쪽으로 경인국도까지는 오류동과 접한다. 남쪽은 경인국도의 중앙선이 되어 오류동과 만나고, 서남쪽 귀퉁이에서는 경인로를 지나 남쪽 부분이 항동과 접한다.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과 접하며, 북쪽은 부천시성곡동의 까치울과 접하고 있다.
더운 물이 나왔다는 곳은 온수동 가운데서도 온수골(옷수골이라고도한다)인데 지금의 한국콘베어공업주식회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있는 곳으로 북쪽은 부천시 여월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 남쪽이고, 남쪽은 온수전철역 앞 세풍운수주식회사 버스 종점 앞 거리이다. 서쪽은 영등포 기계공업단지(일명 온수공단) 산등성이 동쪽, 동쪽은 텃골 위의 산등성이 서쪽이 된다.
옛지명
텃골, 온수골, 능안
텃골에는 조선왕조 세종(世宗)임금의 열셋째왕자인 밀성군(密城君)의 차자(次子) 춘성군(春城君)의 후손들이 살고있다. 조선왕조 초 왕세자이었던 의안대군(宜安大君)이 후사 없이 세자시에 별세하자 춘성군(春城君)을 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정하였다. 그 후 춘성군의 5세손인 이양(李暘)이 1640년대 말(仁祖 말,孝宗 초)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전주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온수골 서북쪽 보름뫼 기슭으로 서융전기주식회사 뒤쪽을 능안이라고 하는데 영등포 기계공업단지가 형성된 것이다. 능안은 왕릉이 있는 골짜기의 안이라는 뜻인데, 온수동 약수터가 있는 골짜기 일대는 신라말 고려 초에 호족들이 정착해 살면서 능이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 주민인 이중학(李重學; 온수동 13-2)씨의 기억에 의하면 일제 때에 능안의 고분을 파본 결과 석곽과 토기 등의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이 중 중요한 유물은 총독부에서 가져가고 나머지는 발굴 참여자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개건너(해방촌)
온수골 동쪽 곧 텃골 동쪽 개천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은 텃골 앞으로 지나는 경인선 너머 개울 건너가 되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 대흥빌라 동쪽 성원연립 옆이 된다.
도당재고개
온수골에서 온수연립주택 단지인 삭새로 넘어가는 고개로 원래는 삭새고개로 불렸으나 도당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온수골 안쪽에서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평안을 빌던 곳이다. 도당산의 높이는 102m이고 온수연립 가압장 자리가 정상에 해당된다. 도당산은 전주 이씨의 선영이다.
독장이고개(덕정)
경인국도변에 있고 고개로 옛날 옹기를 구워서 팔던 독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고 지형지물이 많이 변동되어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동그란산(벽산/시루봉)
지금 온수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을 옛날에는 동그란산 또는 벽산이라 하였는데,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시루봉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약 91m이며, 철길옆이라해서 철마산(鐵馬山)이라고도 한다.
안산
터골 남쪽에 있는 산으로, 터골 앞 경인선건너에 있는 길쭉한 산인데 높이는 약 58m이며 부천시 역곡동과의 경계선상에 놓여 있다. 지금은 동진 · 성원 · 대흥빌라가 들어서있다.
명물 및 명소
온수연립단지
1977년 4월에 당시 공사비 12억 2천만원으로 온수동 우신중 · 고등학교 북쪽 그린벨트지역에 인접한 온수동 산12-1번지와 산 4-1번지 일대 9,865평의 대지 위에 12평형 4가구 연립식의 151동 604가구의 연립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길이 생겼다. 상가, 점포, 어린이놀이터, 파출소 등의 부대시설과 함께 2차분 160가구의 연립주택을 건립하여 무허가 철거민에게 우선 입주권을 분양하여 동년 9월부터 입주하자 경인선과 나란한 온수연립주택단지까지 버스길이 났다.
온수공단(영등포 기계관리공단)
온수동 100-26번지에는 영등포기계관리공단(永登浦機械工業管理工團)이 있다. 세칭온수공단(溫水工團)이라고도 하는 이곳의 총 면적은 온수동 128필지와 함께 부천시 역곡동 24번지의 32필지를 포함하여 155,541㎡이다. 1968년 3월 12일 사단법인 영등포공업인협회(永登浦工業人協會)에서 기계공업단지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가 1970년 4월 20일에는 동추진위원회를 해체하고 대신 영등포기계공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20일에 사단법인 영등포기계공단을 상공부 허가 제161호로 인가받았다. 1973년 8월 3일에는 상공부 공고 제7511호로 기계공업 및 비철금속(非鐵金屬) 적격단지로 지정을 받았으며 동년 8월 24일에는 일본 도야마현(當山縣)의 기계공업센터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어 다음 해 5월 9일에는 숭전대학교와 산학협동 결연을 맺었고 1975년 12월 31일에는 법률 제2843호로 공업단지관리법에 의한 공업단지로 지정받았다.
1977년 5월 8일 공단 새마을중학교를 설립하여 이듬 해 3월 1일 개교함과 동시에 야간 특별학교도 문을 열었다. 1978년 산공부 허가250호로 영등포기계공업단지 관리공단으로 개편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1989년 10월말 현재 입주업체는 146개소로 조립금속이 143개소, 석유화학 1개소, 제지 1개소, 섬유 1개소이고 전체 종업원 수는 약 4,00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