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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생몰연대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노숭(盧崇)의 증조부이다.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지냈다.

노준경(? ~ 1343년, 충혜왕 4)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노숭의 아버지이다. 1343년(충혜왕4) 궁중시어사감찰지평(宮中侍御史監察持平)으로 충혜왕을 호위하던 중원나라 사신 타적(朶赤)이 황제의 명령도 없이 일본을 정벌한다고 하면서 군대와 말의 동원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충혜왕을 말에 태워 원나라로 압송하려고 하자, 노준경과 김영후(金永煦)가 이를 호위하다가 살해되었다.

노숭(盧崧)(1337년 ~ 1414년, 충숙왕 복위6 ~ 태종 14)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감찰지평(監察持平) 준경(俊卿)의 아들이다. 1357년(공민왕6)에 진사가 되고, 1365년(고려 공민왕14)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공민왕이 승하하고 아직 나이 어린우왕(禑王)이 즉위하였으나, 놀기만 좋아할 뿐 절제가 없었다. 어느날 우왕이 신하들과 함께 놀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냇물이 불어났다. 수행했던 신하들이 우왕좌왕하며 왕을 보좌하지 못했는데, 노숭이 왕을 업고 냇물을 건너면서 왕이 절제있는 행동을 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1382년(우왕8)에는 동지밀직겸대사헌이 되었는데, 어느날 왕이 말을 타고 사냥하다가 노숭의 집 앞까지 오게 되었다. 주위사람들에게 이 집이 누구의 집인가를 묻고 노숭의 집이라고 대답하자,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을 빠져 나왔다는 일화도 전한다.


1389년(창왕1)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익산과 나주에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각각 세우고 조운을 편리하게 하여 당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 된 주군(州郡)들을 안집(安集)하였다.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한양윤(漢陽尹)으로서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청렴성과 탁월한 재주를 인정받아 태조에게 발탁되어 1395년(태조4) 개성유후(開城留後)를 거쳐 1397년에는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경기내의 땅에 고관들의 별장이 많았는데, 세금을 공평하게 매기고 청탁을 하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지의정부사(三司左司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다. 노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예순살이 넘은 나이에도 아침저녁으로 노모(老母)의 진지상을 직접 들고 들어갔으며 노모가 94세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며 울부짖다가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1411년(태종11)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으나, 3년 후에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에 올랐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상주의 옥연사(玉淵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를 경평(敬平)이라 하였다.

안경공(1347년 ~ 1421년, 충목왕3 ~ 세종 3)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손보(遜甫). 할아버지는 축(軸), 아버지는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판문하부사에 오른 종원(宗源)이다. 1365년(공민왕14)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한 후 산원(散員),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친 뒤 1376년(우왕2)의 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2년에는 경상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합주(陜州)에서 사노들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고, 1388년(우왕14)에는 예조판서에 올라 불교를 배척하는데 앞장섰다. 1390년(공양왕2)에는 정몽주(鄭夢周)가 윤이(尹伊) ·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하였다고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1392년 좌대언(左代言)으로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중추원도승지에 제수되고 개국 3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출척사로 나아갔고, 1394년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6)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고,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묘가 현재의 구로구 개봉1동 백사리(栢寺里)에 있었다.

여계(? ~ 1428년, ~ 세종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함양, 병조판서 칭의 아들이다.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현재의 구로구 고척동 산 6의 3호에 함양여씨 묘역 및 비가 있다.

이정간(1360년 ~ 1439년, 공민왕9 ~ 세종 21)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고부(固夫),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원종공신 구직(丘直)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집의를 거쳐 1405년(태종5) 강화부사가 되었다. 이때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를 인마의 살상없이 포획하여 비단을 하사받았다. 그 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세종 때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그의 나이 70세 때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가 생존하고 있었으므로 벼슬에서 사임하고 향리에서 노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세종이 이를 알고 그를 자헌대부 중추원사로 승진시킨 후 궤장(机杖)을 내렸다. 이때 세종이 효행을 표창하면서 친히 글씨를 써서 내려준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은 이후 이 집안의 가훈으로 대대로 전한다. 아들로는 사흠(士欽) · 사관(士寬) · 사신(士信) · 사혜(士惠) · 사민(士敏)의 5형제를 두었다. 현재 궁동 궁골의 동쪽 청룡산 아래에 살고 있는 전의 이씨 집안은 고려의 개국공신 이도(李棹)를 시조로 11세손인 이정간 · 이문간(李文幹) 형제가 이 일대 땅을 사패지로 하사받으면서 정착하여 현재까지 20대가 이어오고 있다.

안순(1371년 ~1440년, 공민왕20 ~ 세종 22)

조선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현지(顯之), 호는 죽계(竹溪), 대제학 안경공의 아들이다. 1380년(우왕6) 음모(蔭補)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임명된 후1388년 국자감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0년 (공양왕2)직학(直學)을 거쳐 1393년(태조2) 감찰, 1396년 김해판관, 1401년(태종1) 병조정랑, 1409년 동지총제(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1)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1424년 · 1430년에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호조판서 · 대제학 등을 지냈고, 1432년에 도판충추원사로 판호조사를 겸하였다. 1435년(세종17)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1436년과 1437년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안숭효(? ~ 1460년, ? ~ 세조 6)

조선 세조 때의 공신. 본관은 순흥, 자는계충(季忠), 호는 한백당(寒柏堂), 참찬 안순의 아들이다. 진사가 된 후음보로 장령을 거쳐 호조참의 · 경기도관찰사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1455년(세조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올랐고, 이듬해중추원부사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에는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힘썼다.

하연(1376년 ~ 1453년, 우왕5 ~ 단종 1)

조선 세조 때의 공신. 본관은 순흥, 자는 계충(季忠), 호는 한백당(寒柏堂), 참찬 안순의 아들이다. 진사가 된 후 음보로 장령을 거쳐 호조참의 · 경기도관찰사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올랐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힘썼다.

유순정(1459년 ~ 1512, 세조5 ~ 중종7)

조선 중종 때의 공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양(壤)의 아들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무예에도 능했다. 1487년(성종 18) 진 올랐다. 1506년(중종 즉위년)박원종 · 성희안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정국공신(정國功臣) 1 등에 책봉되어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507년에는 이과(李顆)등이 견성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자, 이를 처리한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다시 봉해졌다. 1510년 제포(薺浦)의 왜인이 변란을 일으키자 도체찰사가 되어 모든 사건을 총괄하였으며, 다시 경상도도원수가 되어 삼포왜란을 평정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무덤이 구로구 오류동 안오류골에 있다.

이순(1530년 ~ 1606년, 중종25 ~ 선조39)

조선 선조때의 문신, 본관은 철성, 자는 자진, 호는 야로이다. 아버지는 참판 언명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승지 박훈의 딸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일찍이 보우의 혹세무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0년(선조13) 어사 송언신의 천거로 광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다. 성주의 유계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야로당문집」이 있다.

송립(1582년 ~ 1667년, 선조15 ~ 현종 8)

조선 인조 때의 공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입지(立之), 백순(伯純)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11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검지산(黔指山)에서 싸우다가 죽었고 그의 형제도 포로가 되어 밀실에 갇히게 되자 송곳으로 벽을 뚫고 달아나 아버지의 시체를 수습하여 안장하였다. 1616년(광해군9)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이 되었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 후에 평안병사 이괄(李适)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반군 3,000명을 거느리고관군(官軍)에게 투항하여 이괄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공으로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봉되고, 보성군수로 임명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죽산부사로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수행하였다. 그 공으로 재령군수가 되었으며, 장수산성(長壽山城)을 쌓았다. 그 뒤 한성부윤이 되었다가 정헌대부에 올라 지충추부사(知忠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정(壯靖)이다.

권협(1542년 ~ 1417년, 중종37 ~ 광해군9)

조선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본관은 안동(安東),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선조10)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 춘추관의 관직을 거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서울 사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병선과 군량을 원조받는데 성공하고 돌아와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이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봉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607년에 예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안동권씨 가운데 최초로 구로구 궁동에 정착한 인물로 무덤이 구로구 궁동 정선옹주 묘역 내에 있다.

권대임(1595년 ~ 1645년, 선조28 ~ 인조23)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자는 홍보(弘輔)이고, 권협의 손자이고 권신중(權信中)의 아들이다. 선조의 일곱째 딸 정선옹주를 맞아 부마도위 길성위(吉成衛)가 되었고, 1636년에는 길성군이 되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필법이 뛰어나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권대임의 부인인 정선옹주는 선조의 후궁이었던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2군(君) 3옹주(翁主) 가운데 둘째 옹주이다.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모두 구로구 궁동 정선옹주 묘역 내에 있다.

권대재(1620년 ~ 1689년, 광해군12 ~ 숙종15)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자는 중거, 호는 소천. 돈간재. 용문, 본관은 안동, 권위중의 아들이다. 1653년(효종4) 별시에 합격하고 1656년(효종7)에, 전라도도사, 대구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즉위 초에 형조참의. 승지.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1679년(숙종5)에는 송시열을 처벌케 하려다가 광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영변에 이배되었다가 1683년 풀려났다. 1687년 기사환국 때 다시 등용되어 제학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림을 잘 그렸다.

이익(1631년 ~ ?, 인조 9 ~ ?)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제이(濟而), 본관은전주(全州)로 극향(克향)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14) 식년시(式年詩)에갑과(甲科)로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휘진 1677년(숙종 3)~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내경, 본관은 전주로 헌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노서 1693년(숙종 19)~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체보(逮甫), 본관은교하(交河)로 하익(夏翊)의 아들이다. 1763년(영조39)기로정시(耆老庭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세현 1722(경종2)~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체보(逮甫), 본관은교하(交河)로 하익(夏翊)의 아들이다. 1763년(영조39)기로정시(耆老庭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동우 1740년(영조 16)~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겸지(謙之), 본관은한산(韓山)으로 세필(世馝)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13) 정시(庭試)에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최명린 1744년(영조 20)~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성서(聖瑞), 본관은해주(海州)로 익운(翼運)의 아들이다. 1765년(영조41) 식년시(式年試)에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구강 1757년(영조33)~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공휴(公休), 본관은능성(陵城)으로 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유하 1767년(영조 43)~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경학, 본관은 전주로 익성의 아들이다. 1795년(정조19)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한홍세(생몰연대 미상)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의보(毅甫), 본관은 청주(淸州)로 후원(後元)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47) 식년시(式年試)에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장석태처 이씨(생몰연대 미상)

학생 장석태의 처로 지아비가 운명하자, 그 뒤를 따랐다. 이에 조정에서 1832년(순조32) 구로리(九老里)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한다.

어명규처 이씨(생몰연대 미상)

조선후기 사람인 어명규가 창질(滄質)이 나니 백약이 무효하였다. 사람고기를 쓰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씨는 몰래 자신의 다리살을 베어 구워 먹였다. 이에 명규의 병이 한결 좋아지고, "이 고기가 무슨 고기이길래 맛이 좋으냐" 하였다 한다. 1841년 (헌종 7)에 정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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