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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제

구로1동 도당제

도당제를 지내는 제단은 산신도당과 군웅당 2개가 있었다. 군웅당은 없어졌고, 당집이 없이 신목(神木)만 있는 산신도당에서 도당제를 지냈다. 산신도당은 음력 6월 1일과 10월 1일 두차례에 걸쳐 오전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물로는 삼색실 · 술 · 북어 · 시루떡을 진설하였다. 제사비용은 각 호당 일정액을 거출하였는데, 1968년에는 100원씩을 걷었다. 본 도당제는 산신령께 마을의 안녕과 태평무사를 기원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군웅당의 산신제는 음력 2월2일과 6월 2일, 10월 2일 연 3회에 걸쳐 지냈는데, 제물 및 제사비용의 거출은 산신도당과 비슷하였다고 한다.

수궁골 도당제

수궁골 도당제는 본래 도당제를 지내면서 농악과 풍물패들이 주민과 함께 어우러져 마을축제로 벌이는 민속놀이었다. 도당제의 유래에 대한 확실한 문헌자료는 없으나 구전에 따르면 고려말 서해로부터 외적의 침입이 빈번할 당시 마을의 평화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 온수연립 주택단지 가입장 부근 산을 지금도 「도당산」「도당재고개」라고 부르고 있으며 예전에 도당나무가 있었다. 이 곳 도당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원보름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도당제를 올리고 농악과 풍물패들은 온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와 안택굿을 벌였다. 수궁골 도당제는 구로구 대표로 1990년 서울시민민속축제 행사에 출연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해 9월 한강제방 뚝이 무너질 정도의 폭우로 인해 행사가 중단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항골 산신제

항골 산신제

항골 산신제

항골산신제의 제단은 서낭고개(웃당골)가 굴봉 중턱에 있었다. 하지만 신목인 전나무는 고사하였고, 서낭당도 거의 쓰러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정월 보름에는 동신제를 올려 안녕과 축복을 구하고 10월 상달에는 지난 1년간의 농사와 함께 정월에 빌었던 것을 성취했음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농공제와 성주제 두 가지로 나누어 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동신제는 하지 않고 10월의 감사제만 지내고 있다. 곧 산신제이면서 성주제를 겸하며, 거기에다 개천절 기념행사까지 곁들여 행한다. 길일을 택해 햇곡식으로 제물을 만들어 가택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일가의 평온무사를 비는 것으로 안택제도 겸한 마을 사람 모두의 축제였다.항골산신제의 제단은 서낭고개(웃당골)가 굴봉 중턱에 있었다. 하지만 신목인 전나무는 고사하였고, 서낭당도 거의 쓰러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정월 보름에는 동신제를 올려 안녕과 축복을 구하고 10월 상달에는 지난 1년간의 농사와 함께 정월에 빌었던 것을 성취했음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농공제와 성주제 두 가지로 나누어 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동신제는 하지 않고 10월의 감사제만 지내고 있다. 곧 산신제이면서 성주제를 겸하며, 거기에다 개천절 기념행사까지 곁들여 행한다. 길일을 택해 햇곡식으로 제물을 만들어 가택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일가의 평온무사를 비는 것으로 안택제도 겸한 마을 사람 모두의 축제였다.


정월에 이 마을 사람들은 윷놀이를 즐기면서 각종 마을행사에 사용되는 비용의 재원을 마련하였다. 곧 집집마다 장정 한 사람씩 나와 패를 나눈 다음 윷놀이는 하는데, 출전선수는 쌀이나 잡곡 한 되를 참가비용으로 내고 이것을 수합하여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서울 정도 600년에 즈음하여 항골산제를 무형문화재로 전승하기 위해 1993년 11월 17일 항동의 김광태노인회장, 김학배, 안기남, 김광홍씨가 제관이 되어 지낸 산제는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에 보도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류동 도당제

오류골에도 오류초등학교 동쪽 100m 지점에 위치한 감리교회자리를 도당자리로 해서 도당제가 열렸는데, 한국전쟁이후에도 도당굿이 벌어졌다고 한다. 1961년 이후 폐쇄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도당굿의 내용과 절차는 인접지역과 유사했다고 전해지고있다.

개봉동 도당제

개봉3동 271번지 19에는 구로구지정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창년조씨 선조가 심었다고 한다. 매년 10월 초사흘에는 지금도 종산을 옆에 모시고 있는 조상익이 이 나무에서 도당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갓난애, 어린이, 청년들이 많이 죽어갔다. 어느날 조상익의 모친 꿈에 수염이 하얀 도사가 나타나 다시마를 튀겨서 산고사를 지내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대로 마을의 30여 호에서 양곡을 거두어 고사를 지내면서부터 사람이 죽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천왕골 도당굿

행촌에서 항동으로 넘어가는 항동고개가 있는 골짜기는 대낮에도 컴컴하고 습해서 부엉이가 울었기 때문에 붱고개라 하였는데, 이곳에 도당이 있었기 때문에 도당골이라고도 하였다.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날 자정이 지나면 서낭이 남아있는 도당골에서 이 지역의 터줏대감격인 진주하씨(晉州河氏)와 청주한씨(淸州韓氏) 두 집안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평안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우선 도당골에다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은 다음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다는 신목(神木)인 전나무 주위에 금을 긋고 어느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는 도당굿을 행하기 3일 전에 제단과 신목주위를 깨끗하게 치우고 전나무 주위에 그어 놓았던 금 안쪽에는 부정을 타지 않도록 예방한다는 뜻으로 황토를 펴서 깔고, 깨끗한 솔가지를 골라 꺾은 후 새로 왼쪽으로 꼬아 놓은 새끼줄에 끼워서 만든 금줄을 쳐놓는다. 당집 주변에도 이 금줄을 쳐놓고, 제주(祭主)의 집대문밖에도 금줄을 쳐놓아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동신제의 거행 여부는 마을 모임에서 정하는데, 제주가 될 만한 사람을 먼저 선정하였다. 제주는 마을 사람 중에서 비교적 나이가 많고, 상중이 아닌 깨끗한 사람으로 하였다. 제주가 되면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여 몸을 깨끗이 해야 하고, 고기도 먹지 말아야 했으며. 길거리에서도 상주나 병자는 피하고 설혹 마주쳤을 경우에는 즉시 목욕재계를 함으로써 부정을 방지하는 등 따르는 금기가 많았다.


제주는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미리 준비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제단으로 가서 기름불이나 촛불로 주변을 환하게 밝힌 후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준비해 놓았던 밥 · 나물 · 떡 · 어육 · 과실 · 술을 차려 놓은 다음 보름날 오전 0시가 되면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이 행사에 관한 평가회를 겸하는 모임이 있었다. 평가회에서는 동신제에 대한 경과 보고 및 제주의 선정, 음식의 장만, 동제에 사용된 비용 결산을 함께 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있을 동신제의 준비와 비용 마련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의논하고 계획하였다.


도당굿은 물론 지신밟기와 안택굿까지도 이곳 도당에서 하였지만 외지 사람들이 천왕동으로 이주해 오고, 또 이 마을 주민들이 자꾸 외부로 빠져나가면서 도당굿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자 도당굿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마을의 축제행사로 세시풍속의 하나였던 이 도당굿을 이어받으려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현재는 그 맥은 끊어지고 행사가 중지되고 당집은 퇴락되었다.

고척동 도당제

고척동 도당제

고척동 도당제

고척동에서 양천구 목동과의 경계 지점에우렁바위 또는 길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다. 바위가 울었다 하여 우렁바위라 불렸고, 또한 바위 모습이 감투나 사모처럼 생겼다고 하여 감투바위, 사모바위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이 바위를 목동아파트단지물탱크가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1988년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10월 초하루에 이 바위에서 동네의 번련하였으며바위 밑 땅속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조랏술을 담궈놓았다. 제주는 물론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도 부정이 없고 깨끗해야 하므로 동네회의에서 엄선하였으며, 술과 음식을 가지고 10월 1일 아침나절에는 산 위의 바위에 올라와서 낮 12시가 되면 고사를 지냈다. 고사가 끝난 후에는 준비했던 음식과 조랏술을 마을 주민들이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마을의 대소사를 서로 의논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바위를 옮기고 난 후부터는 마을의 수문장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소 문제때문에 도당제를 지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신정제1근린공원에 우렁바위 약수터가 있다.

전설

개봉동 두루미산

개봉동에는 두루미산 또는 두름산이 있는데, 이 산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어느 해에 큰 장마가졌는데, 어디선가 조그마하고 동그란 산이 물살에 떠내려 와 논한가운데 자리잡았고 이 산에 백로가 날아와 서식했기 때문에 이 산을 두루미산이라고 칭했다고도 한다. 두루미산은 개봉동과 양천구 신월동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1968년 전까지 흑연광이 있었다.

개봉동 느티나무

개봉동 느티나무

개봉동 느티나무

개봉3동 271번지 19에는 구로구지정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수령은 400년, 흉고둘레 385cm, 높이 16.5m에 이른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노거수로서 지상 3m에서 4가지로 퍼진 형태로 수관의 직경이 20m에 달한다.


현재 고사목으로 그 옆에 느티나무 묘목 2그루를 식수하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창녕조씨 선조가 심었다고 하는데, 매년 10월 초사흘에는 지금도 종산을 옆에 모시고 있는 조상익이 이 나무에서 도당제를 지내고 있다. 예전 이 나무를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갈 정도로 신성시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나무 앞으로 말을 타고 갈 수 없었는데,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신랑이 탄 말의 다리가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70년 전에 이 느티나무에 제사를 지낼 때 어느 임산부가 자신이 임신한 줄도 모르고 제사를 지내는 곳에 갔다가 손가락이 6개인 아이를 출산했는데, 현재 노인이 된 그 아이는 아직도 이곳에 거주하고있다.


또 광복이 되던 해에 이 느티나무 옆에 있던 가죽나무가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어느 사람의 꿈에 도당할아버지가 나타나 "고사를 다른 나무에 지냈다"라고 호통을 쳐서 비로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천왕동 하정승(河政丞) 전설

옛날 이곳이 부평 땅이었을 때 원님이 부임 첫날밤에 죽는 일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세 번째 부임한 원님까지도 그 이튿날 시체로 변하였는데도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어느 무장이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중 나라에서는 이왕 죽일 바에야 부평 원님으로 보내서 죽게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사람을 원님으로 제수하여 보냈다.


부임한 원님은 첫날밤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경이 되었을까 할 무렵 일진광풍이 일면서 촛불이 꺼졌다. 담력이 강했던 원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방문이 열리더니 머리에 옥관자를 한 선비가 나타났다. 원님은 그 모습을 보자 보통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머리를 조아려 "어인 일로 이 밤중에 행차하셨습니까?"하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 선비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내가 이제야 사람을 만났군"하면서 자리에 앉아 정좌하였다. 그리고는 "나는 신현(新峴)의 뱀내에 묻혀있는 하연(河演)이요"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원님은 이 말을 듣자 등이 오싹하면서 식은땀이 났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던 문효공(文孝公) 하연 정승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정승은 또 말하기를, "내 묘역에 도벌꾼이 들어와 나무를 마구 베어가고 있으니, 이를 막아주기 바라오, 내가 이 일을 요청하러 오면 그때마다 원님들이 혼절하여 죽어 버리니, 매우 안타까웠소. 하나 그대는 마침 담력이 매우 커서 이 일을 실천할 수 있을 듯 하니, 꼭 막아주기 바라오. 그대가 내 소원을 들어주면 나도 그대를 도우리라"라고 하였다. 원님은 "대감의 소원을 이제 알았으니, 날이 밝는대로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이제 저승에서 편안하게 주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정승의 소원을 달래주었다.


이튿날 아침 원님이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처리할 준비를 하고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전들이 깜짝 놀랐다. 원님은 곧바로 도벌꾼을 색출하여 벌을 주었다. 나라에서도 벌목은 금하고 있던 터라 도벌꾼의 색출로 무장인 원님은 사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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