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개봉동은 경인선과 남부순환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남쪽의 개웅산과 북쪽의 매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개웅산 "개"자와 매봉산의 "봉"자를 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개봉제1동은 그 면적 중 매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고척 2동과 서쪽은 오류동 그리고 남쪽은 개봉2동 또한 북쪽은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영조 때에는 부평도호부 갈탄(葛灘)이었다가 1895년에는 인천부 소속이되었으며, 1896년에 다시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갈탄으로 바뀌었고,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개봉리가 되었다. 1941년10월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개봉리가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개봉동으로 동이란명칭을 갖게 되었다. 1968년 1월 1일 오류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의직할동이 되었으며, 이어 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한 제방(堤防)의 변동에따라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6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일부를 영등포구 개봉동에 편입하였고 개봉동의 일부를 시흥군에편입하여 면적상 0.28㎢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1977년 9ㅣ월 1일에 대통령령 제8666호에 의해 영등포구에서강서구가 분구 되어 행정동의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서울특별시조례 제1181호(1977년 8월 29일 공포)에 의하여 인구 3만명이상의 동을 분동(分洞)하였는데 이때 개봉동이 개봉 1동과 2동으로나누어졌다. 분동 내역을 보면 경인선철도를 기준으로 나뉜 개봉 1동의인구는 18,739명이었고 개봉 2동의 인구는 16,534명으로 합계35,273명이었다. 이어 1980년 4월 1일 구로구의 신설로 개봉동은구로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동년 7월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413호「동사무소설치조례」에 의하여 상주인구 3만명 이상 또는 1년 이내에3만명 이상으로 급증이 예상되는 동을 분동할 때에 개봉 2동은개봉2동과 3동으로 나누어졌다. 이 때 나누어진 개봉 2동의 면적은1.55㎢에 인구 20,291명이었고, 개봉 3동은 면적 0.78㎢에 인구는12,974명이었다.
그 이후 개봉 1동은 집단거주 지역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와서 고척동 길과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개봉1동의 동남쪽을 개봉 본동으로 1994년 11월1일부터 분동하게 되었다. 1994년 11월 1일 분동 당시의 동세를 보면개봉 1동이 0.63㎢에 인구수 21,741명이고 개봉 본동은 0.71㎢의 면적에인구는 16,334명으로 개봉 1동이 26개 통 189개 반이었고, 개봉 본동은21개통 152개 반이었다.
법정동은 행정동인 개봉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치 및 연혁
개봉동의 위치는 서쪽은 양천구 신정동과인접하고 남으로는 오류동 · 천왕동과 접하며, 동으로는 개봉천을 사이에두고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과 경계하고 북으로는 고척동과 마주한다. 동의 중앙에 동서로 경인로와 남부순환로가 지나고 그 교차 지점에 오류인터체인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개봉로가 관통하고 있어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입지로 인해 안양천 서쪽의 구로구지역 가운데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며, 많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일직부터 도시화가 진전된 지역이다.
옛지명
잣절
잣절인 백사리(柏寺里)는 옛날에 잣나무가 많았고 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불린 마을 이름인데, 오류초등학교 뒷산 너머 남부순환도로 변에 있으며 이 마을은 광산(光山) 김씨(金氏)의 집성촌(集姓村)이었으며 마을 뒷산에는 잣절 약수터와 배드민턴장을 비롯한 각종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이곳 주민들의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 거성푸르뫼APT 산등성이를 넘어 오류초등학교로 가는 고개를 옛날에는 잣절고개라 불렀다. 이마을은 1970년대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덕고개
경인로 덕산병원 부근을 옛날에는 덕고개라 불렀는데, 이 고개는 경인로 확장과 남부 순환로의 개설로 인해 이 두 도로가 교차하는 오류 인터체인지로 변했다. 개봉 · 고척 지역에서 이 고개를 넘어 오류동과 인천으로 가는 유일한 고개로 대보름에는 이곳에서 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덩어리
덩어리는 현재 고척2동사무소와 덕의초등학교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고척동 가운데 역사가 가장 깊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덕의리는 30년 전까지만해도 가옥이 20여호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덩어리로 부르고있다.
가린열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개봉동의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갈대가 많고 여울이 많은 곳이라 하여 가린여울 또는 가린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칡과 같이 여러 갈래의 개천 즉 개봉천 · 오류천 · 개웅천이 안양천과 합수되어 여울이 많다. 하여 갈탄(葛灘)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갈대가 많고 넓은 습지였던 곳으로 수리조합이 있었는데, 지금의 개봉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으로 옛날 물을 조절하던 수리조합의 펌프장이었다. 가린열은 아래의 부누꿀과 광주물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부누꿀
부누꿀은 가린열 북쪽마을로 지금의 성아단지 아래쪽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지역으로, 옛날에는 이 지역이 구릉지로 자두밭이었는데 매립하여 성아단지를 조성하였다. 뒷산인 가녈봉(일명 갈탄봉)을 부누꿀 뒤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부누꿀산이라고도 불렀다.
광주물(광지물)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 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 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 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 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 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 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개봉빗물펌프장을 확장 신설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개웅산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 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투입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개웅마을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 뒷산인 학산은 개웅산과 매봉을 잇는 중간에 있는 얕은 능선이라고 볼 수 있는 자은산으로 좌우로 경인선 철도와 남부순환로, 경인로가 동서로 횡단하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6 · 25동란 당시에 수도권 지역이 북괴에 점령당하였을 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과 부천을 탈환한 UN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 때 인천과 수도 서울을 잇는 중요한 병참 보급로였으며 기계화부대의 유일한 통로구실를 하였다. 이 곳에서 북괴군은 최후 저지선을 구축하고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UN군은 이를 어렵게 격멸하고 영등포 노량진을 넘어 서울을 장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학산을 점령하면 서울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 산은 예비군 전술훈련장으로 사용되다가 남부순환로가 개통되면서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작은산으로 남아 있다.
학산(일명 : 두루미산)
능골에서 고척동 육본단지를 통하여 개봉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를 흙이 붉은 관계로 단혈(丹血)고개라 했는데 전에는 서낭당이 있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