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가리봉동은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동면(東面) 가리산리(加里山里)였다가 가리봉리(加里峰里)로 바뀌었다. 가리산리에서 가리봉리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시흥군동면 가리봉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가리봉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까지 큰 변동이 없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가리봉동(加里峰洞)의 가(加)와 독산동(禿山洞)의산(山)자를 따서 가산동(加山洞)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새로 편입된 지역은 면적이 광활하였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서울특별시조례제276호로 이들 지역은 관할하는 10개의 출장소를 신설하였는데 가산동은 영등포구의 관악출장소가 관할하였다. 그러나 1969년 1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491호로 10개 출장소 중망우 · 오류 · 양동 ·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가산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하여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분동되었는데, 당시 가리봉동의 면적은 3.36㎢였으며3,673가구에 인구는 33,045명이었다.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1185호로 인구 2만 5천명 이상의 동을 분동하였는데, 이 때 가리봉동은 가리봉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1일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구로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0년 7월 1일서울특별시조례1413호「동사무소 설치조례」에 의해 가리봉1동이 가리봉1동과 가리봉3동으로 분동되었다.
1995년 3월 1일 금천구가 신설되어 구로구에서 분구(分區)됨으로인해 가리봉동의 일부와 독산동, 시흥동은 금천구가 되었다. 이 때금천구와 구로구는 남부순환도로를 경계로 하였는데, 그 결과가리봉1동의 일부와 가리봉 2동의 대부분 그리고 3동의 전부가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가리봉1동의 면적은 0.29㎢에서 0.255㎢로 0.035㎢가줄어든데 그쳤으나, 가리봉2동은 2.03㎢에서 0.147㎢로 면적이 10분의 1이하로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남부순환도로 남쪽의 공단지역이 모두금천구로 편입되어 면적으로나 인구로나 구로구 내에서 가장 영세한 동이 되고 말았다.
가리봉동의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지역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연원을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혹은 "가리"에서 찾고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에서 유래하는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짓가랑이처럼 갈라져 있는 것과 연관된 명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위치 및 연혁
가리봉동의 북쪽과 동쪽은 구로동과 접하고있고, 서쪽 · 남쪽은 남부순환도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보고있다. 가리봉동의 공단오거리 주변은 공단근로자를 상대로한 다양한 상가가 형성되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하고 있다.
옛지명
큰노배미
하구로리(下九老里)의 옛 명칭으로 구로동가운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원래 구로리는 상 · 중 · 하의 3개의 마을로 형성되었으며 그 중 가장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구루지 마을이다. 지금의 구로5동주민센터가 동남쪽 일대가 구루지 마을이고그 중심지는 애경백화점 뒤편 부근이라고 한다.
모아래
현재의 가리봉동 89번지 일대를 가리키는말이다. 이 대촌은 가리봉 2里에 있었던 마을로 가리봉동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큰 마을이다. 촌은 우리말로 "배미"라고 풀이된다. 따라서 대촌은 큰논배미 또는 한논배미라는 의미로, 농경이중심이 되었던 전통 사회에서는 큰논배미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당시 밤나무골 · 사당골 · 석바탱이 등도대촌의 한 마을이었으며, 과거에 대촌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한 지역이 지금도 상가와 주거밀집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연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각만이마을
각만이 마을은 현재 구로5동사무소 서쪽 애경백화점 오른쪽에 있던 마을로 풍수가들이 앞으로 이 지역에 수만호가 들어앉을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예언대로 이곳에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인구밀도도 높을 뿐 아니라 통행인도 많은 곳이 되었으니, 풍수가들의 예언이 들어맞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마을의 뒷동산을 각만이 동산이라고 불렀는데 옛날에는 숲이 많았다고 한다.
새말
모아래는 가리봉 1동에 있던 마을로 40여세대가 모여 살면서부터 유래된다. 모아래가 있던 곳은 원래 청룡(靑龍)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靑龍穴)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랫쪽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못아래 마을이다.
명물 및 명소
모아래
모아래는 가리봉동에 있던 마을로 40여세대가 모여 살면서부터 유래된다. 모아래가 있던 곳은 원래 청룡(靑龍)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靑龍穴)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랫쪽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못아래 마을이라 하였다가 후에 음이 변하여 모아래가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