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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47 작성일 2008년 12월 17일 10시 19분 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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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도시구조 발전내용입니다.
부서 도시계획과

도시구조

1394년 10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 6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간 서울의 인구는 100배 이상 늘어났고, 면적도 38배나 늘어났다. 조선시대의 서울인, 한성부 시대의 초기에 인구는 대략 10만인 정도였으며, 인구가 20만인 으로 증가하는 데 약 400년(조선조 세종대에서 순조)이 걸렸다. 일제시대의 서울 즉, 경성부 시대의 초기 인구는 대략 25만인 으로서 100만인으로 증가하는데 10년이 걸렸다.

대한민국정부 수립후 서울은, 서울특별시 시대가 시작된 1945년 인구는 90만인이었으며, 인구 100만인에서 200만인으로 되는 데 15년, 200만인에서 400만인으로 또 400만인에서 800만인으로 되는 데 각각 약 10여년이 걸렸다. 또 인구의 증가와 함께 행정구역도 해방당시의 136.04㎢, 1973년의 627.06㎢로 확장 되었고 현재 605.95㎢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인구증가와 면적확장이 이루어지는 동안 서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큰 변화를 경험하여야 하였다. 임진왜란을 위시한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도성내의 화재 등으로 시가지를 다시 복구하여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적도 있었다. 광복 이후에는 6.25동란으로 시가지가 폐허화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의 비약적인 경제개발과 도시성장으로 이제는 세계 유수의 거대도시중의 하나로 된 것이다.

수도이전의 서울

수도이전의 서울 이미지한반도의 중앙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변 일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서울 부근은 선사시대 이래로 줄곧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민족역사의 중심에서 성장해왔음을 기록과 유물, 유적들이 말해주고 있다.

선사시대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던 서울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도읍지로 선택되어 처음으로 수도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삼국의 각축장이 된 백제의 도읍 위례성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결과로 고구려 영토인 북한산주, 남평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삼국의 주도권이 신라에 넘어가게 되자 서울은 다시 신라의 한주, 한양군이 되었다.

서울이 도시로서의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와서였다. 1067년(문종21)에 삼경제도가 갖추어짐에 따라 서울은 고려왕조의 남쪽 서울(남경)로서 궁궐이 세워지게 되고 주민의 이주가 시행되어 비로소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서울은 삼경중의 하나가 아닌 본격적인 수도의 후보지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우왕과 공양왕 시기에 각각 6개월동안 천도가 현실화되어 실제로 수도가 되기까지에 이르렀다. 특히 공양왕 2년(1390)에는 관서를 구경(개성)과 신경(서울)에 양분하여 천도하였으나, 서정체계의 미비, 호환과 모해사건으로 인한 민심불안 등으로 인해 이듬해 환도해 버리고 말았다.

 

한양천도

한양천도 이미지태조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역성혁명을 한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긴다는 당위성 아래 흩어진 민심을 일신시키자는 계기로서, 구왕조와의 보이지 않는 끈을 끊어버리기 위한 의도로서 천도의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조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1392년 태조가 한양천도를 명한 이후 새 왕조를 위한 새로운 도읍지가 실질적으로 확정되기까지는 13년에 걸친 논쟁을 거쳐야 하였다.

천도의 후보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풍수지리였다.
계룡산이 후보지로 대두된 것도, 무악이 거론된 것도, 그리고 개성을 고수하자는 의견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풍수지리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풍수지리라고 하는 것은 한 지역을 놓고서도 의견이 엇갈릴 수 있었다.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정종대에 수도가 개성으로 되돌아간 적도 있었으나 결국 1405년 10월 태종에 의해서 한양으로의 전격적인 천도가 이루어졌다. 태종은 마지막까지 논의된 3개의 후보지인 한양, 무악, 개성을 두고 최종 결심하여 결국 한양이 수도로서 결정된 것이다.

당시 한양천도론자들이 주장한 한양의 수도로서의 적격성은, 첫째 풍수지리상으로 송악(개성) 다음가는 훌륭한 자리이고, 둘째 수운이 편리하여 물자수송에 유리하고, 셋째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어상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중앙집권체제에 편리한 여건을 갖춘 점이었다.

또 위와 같은 현실적인 지정학적 여건도 중요하나 서울이 갖고 있는 수도로서의 민족사적 당위성도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서울은 삼국문화의 교차지로서 고조선으로부터 흩어졌던 민족의 문화를 다시 통합하여 통합된 민족국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문화사적 중심성과 개방성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국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수도의 건설

신수도의 건설 이미지태조는 한양 천도를 결정한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신수도의 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10월에 천도를 결행하고 11월에는 ''''공작국''''을 설치하여 종묘와 궁궐, 관청들의 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인 신수도 건설을 시작하였다.
천도 다음해인 1395년에는 1월에 대신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주택을 건설할 대지를 나누어주어 본격적인 도시의 형성이 시작되었고 9월에는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한편 1395년 6월 태조는 신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신수도를 5부52방의 구역으로 분할, 행정구역을 확정지었다.
즉 한성부는 도성 내부와 구 주변의 십리구역, 이른바 ''''성저십리''''로 획정되어 행정구역상의 이원적 체제가 확립되었고, 도성내를 5부로 나누고 그 밑에 방을 두었다.

그러나 천도와 동시에 시행하려 하였던 성곽의 축조는 궁궐과 종묘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이라는 성곽수축을 담당할 기관을 설치하여, 총 59,500척에 이르는 성을 쌓을 자리를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하고, 다음해인 1396년 1월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두차례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태조에 의한 약 4년간에 걸친 건설로 신수도의 틀은 윤곽을 갖추어 갔으나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해 버림으로써 한양은 다시 쇠락하였다.

본격적인 신수도의 건설은 1405년 태종이 환도한 후 시전행랑을 건설하여 신수도내의 간선도로의 구획을 확정하고, 1422년 태조때 건설한 성곽을 세종때 석축으로 개축하여 성곽의 둘레를 확정하며, 1403년 신수도내 중심을 동서로 흐르는 개천의 정비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초기의 서울의 상황은 조선중기의 전란에 휩쓸리기까지 약 150년간 큰 변화없이 지속되었다.

 

조선중기의 서울

태조에서 세종기에 형성된 서울의 시가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들의 거듭된 전란에 휩싸여 초기의 모습을 잃어 갔다. 계속되는 외침과 내란, 화재에 의해 파괴된 서울은 효종(1649-1659)에서 영조(1724-1776)까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전란의 상처를 씻어낼 수 있었다.

조선 중기의 서울은 고난의 시기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0년 가까이 계속된 전란으로 궁궐, 시전상가, 민가가 파괴되어 버렸으나 재건을 하려고 하여도 서울뿐만이 아닌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단시일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전란 후 약 100년에 걸쳐 점전적인 복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복구가 활발해져 전란 이전보다도 번성한 시가의 모습으로 수도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서울

조선후기의 서울 이미지전란중 서울의 인구는 격감하였다가 전란 이후 급증하였다. 전란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결국 성저십리의 면(성 밖 십리이내 지역에 둔 행정구역, 성저십리의 면에서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경작, 주택건설, 묘지, 벌목이 금지되어 있었다)들은 주거지화 되었고, 이에 따라 면을 폐지하고 5부관할구역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와 시가지의 확장이 상업발달의 기반이 되었고, 상업의 발달은 서울 주변에 위성도시를 형성시켜 서울의 도시구조를 변화시켰다.

용산, 서강, 마포, 서빙고(옥수동)는 한강의 수운을 통하여 전국의 물자가 몰려드는 곳이었고, 노원(의정부시 호원동), 송파, 과천은 육로로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로서 교통상의 요충지에 위성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 위성도시들은 인구규모에 있어서도 지방의 대도시들에 버금갈 정도였다.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개항기 도시구조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외국 거류민의 집거였다. 용산 일대와 이태원 일대가 일본군의 주둔지로 개발되고 한강로가 건설되자 용산은 서울의 새로운 남북축으로 부상하였다.

개항기 이후 경제권을 쥐게 되었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이남, 즉 남촌에 집거하게 되면서 남촌지역은 일인들에 의하여 개발되어 새로운 상업, 경제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종로지역은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고, 중구지역은 경제, 상업의 중심이 되며, 용산지역은 군사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서울의 도시공간구조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이미지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이미지1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전차노선의 건설이었다. 전차노선이 동서남북축을 이루면서 건설되어, 조선시대의 보행중심의 도시구조는 전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하여 본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일병탄후 전차노선의 건설은 더욱 촉진되어, 1912년 을지로 노선의 개통으로 총연장 39㎞에 달하는 교통망이 확립되어 이전의 보행중심에서 전차 노선망 중심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일본은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서울의 도시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시구개정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이후 1926년에는 제1차 경성도시계획안이 수립되었으며, 1차 도시계획 이후에도, 1928년과 1930년에 제2차, 3차 경성도시계획안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실시계획과 재정계획이 뒤따르지 못하여 결국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도시개발의 주축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1937부터 1944년까지 영등포, 돈암, 대현지구등 19개 지구의 서울 외곽지역이 개발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말기로 치닫던 1937년에는 방공법 조선시행령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 공습에 대한 방비책으로 오늘날의 퇴계로, 율곡로, 원효료 등은 소개공지대계획노선이었던 것과 같이 도시계획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재복구와 수도로서의 면모 확립

해방이후부터 제1공화국이 붕괴된 1960년까지의 15년은 우리 역사상 격변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서울은 주권국가의 수도로서의 위치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즉,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고, 그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할로부터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가 되고, 3년뒤인 1949년 8월 15일에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 당시의 서울은 해외동포의 귀국, 월남한 난민과 이주민들의 서울 집중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증가현상을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49년 도시행정구역확장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6.25동란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도시파괴를 가져왔다. 휴전이후 서울은 전후 복구사업으로 활발히 재건되었는데, 부산 임시수도시절 도시계획위원회에 의해 새도시계획(1952. 3. 25 고시)이 수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크게 적용되지는 못했다.

이상과 같은 광복 이후 1960년까지가 혼란과 전란으로 인한 파괴에 시달린 시기였다면 60년대와 70년대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서울이 현대도시로 부상해 나아간 시기라 볼 수 있다. 현대도시건설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는 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71)의 추진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게 된 때였다.

특히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이 기간동안 급속히 심화되어 1963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도시계획구역이 확장되어 서울이 강남과 동북부로 확장되는 계기를 맞았다.

 

현대적 도시의 건설과 국제도시로의 부상

7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도시로의 과도한 집중이 점점 큰 문제로 대두되어 도시계획이 대도시권 성장억제측면에서 접근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지금까지의 서울위주의 도시건설로 인해 야기된 수도권 인구의 과밀화를 억제하고 전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다.

또한 1970년대 이후는 서울이 명실상부한 현대도시로 탈바꿈하는 시기였다. 업무 및 상업기능이 집중되는 도심을 재개발사업을 통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고층의 오피스빌딩들이 이 시기를 시작으로 집중 건설되었으며, 60년대에 시작된 강남개발도 본격화되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었으며, 청량리, 미아리, 영등포, 천호, 영동 등의 부도심이 형성되었고, 부천, 의정부, 성남, 안양, 반월(현재의 안산), 광명 등이 서울의 위성도시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도심의 현대화와 부도심의 형성 그리고 외곽의 위성도시의 건설로 서울의 시가지는 청계천과 종로를 경계로 북촌과 남촌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형성되고 그 주위로 많은 위성도시들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서울의 1980년대는 1981년 9월의 올림픽 유치 결정과 11월의 아시안게임 유치 결정으로 도시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80년대 서울의 도시개발은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정비와 건설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도시계획과
  • 전화번호 02-860-2384
  • 콘텐츠수정일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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