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소개

교통

도로

경인로(京仁路)

구로지역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에는 경인로(京仁路)가 있다. 경인로라는 이름은 1966년 11월 26일에 붙여졌는데, 그 연유는 이 도로가 서울과 인천간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도보 길로서, 오늘날에는 자동차 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경인로가 현재 국도 4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그 만큼 이 도로가 중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인로의 역사적 연원을 근대 전후를 중심으로 하여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경인로는 수도 서울과 어촌 인천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육상교통로였다. 그렇지만 인천이 아직 항구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데다 한강의 주운(舟運)이 화물수송의 동맥이었기 때문에 경인로는 그다지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876년 일본과 수호조규가 맺어지고, 1883년 인천이 무역항으로서 외국에 개방됨으로써 경인로의 중요성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비하여 1881년 경인간에 거마(車馬)가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경인로 주변의 지방관들로 하여금 이 도로를 수축(修築)하도록 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인로의 폭과 노면의 상태는 중국과의 사행로(使行路)였던 경의가도(京義街道)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인천의 일본상인들은 1882년 무렵 경인무역의 발전을 위해 경인로를 개수(改修)해 줄 것을 영사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때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침공한 일본군의 기록에, 경인로의 폭이 2미터 정도이고 노면은 요철(凹凸)이 심하여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경인로의 개수는 뜻대로 진척되지는 않은 것같다.


그렇지만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한강주운(漢江舟運)을 이용하지 않는 한 경인로가 주요 교통로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도로에는 보행자 승마자(乘馬者) 교여(轎與) 짐꾼 등으로 붐볐다. 1892년의 조사에 의하면 경인간의 노비(路費)는 승마가 편도 2원 50전, 왕복 3원 50전, 교여가 4인 인부임(人夫賃)을 합쳐 편도 3원72전이었고, 화물을 운반하는 태마가(태馬價)는 편도 1원8전이었다.


경인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류동(梧柳洞)은 사람과 화물이 숨을 돌리고 가는 중간 기착지로서 번성하였다. 오류동 일대는 옛부터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풍치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밭농사 등이 성하여 인근의 물산이 집산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30호 정도의 오류동은 경인간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요기를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여인숙과 음식점들이 많았다. 흔히 주막거리라 불리었던 장소도 이 근처였다. 안양천 하류의 한강변에 위치한 양화진(楊花津)도 경인간을 왕래하는 사람과 물자로 붐볐다. 구로지역의 중요한 선착장이었던 양화진은 대안(對岸)의 마포에 왕래하는 화객이 많았다. 양화진부터 마포까지의 도선운임(渡船運賃)은 2전 정도였고, 서울까지 1시간 내외면 충분히 진입할 수 있었다.


한국정부는 경인간의 육상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1893년경부터 경인로에서 마차를 운행했다. 정부는 인천에 있던 청국 무역상 동순태(同順泰)를 통하여 청국 관영회사 초상국(招商局)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로써 청국제 승객마차 40량, 짐마차 60량을 구입했다. 이들은 서울-의주, 서울-인천 사이의 화객운반에 투입되었다. 마차들은 매일 정시(定時)에 각 지역간을 왕복하였다. 마차는 보통 목제(木製) 대형 이륜차(二輪車)로서, 객차는 두 마리의말이, 짐차는 8-9마리의 말이 끌었다. 객차는 승객 2명과 심부름꾼 1명을 태우고 경인간을 6시간에 주파하였다. 짐차는 금건(金巾) 2곤(梱)혹은 물건 80근을 실을 수 있었다. 말은 중국 북부산으로서 한 마리에 한국돈 20-30량이었다. 객마차의 요금은 편도에 3원 내외로서 교여보다 저렴했다. 교여는 1인승이었지만 마차는 4인승이었고, 소요시간도 6시간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단히 편리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서는 한강주운과 경인철도(京仁鐵道) 때문에 경인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기관이었던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1907년부터 사대도로(四大道路 :鎭南浦-平壤-元山, 光州-木浦, 大邱-慶州-迎日灣, 全州-郡山), 1908년부터 칠대도로(七大道路) : 水原-利川, 馬山-晉州, 公州-小井里,新義州-寧邊, 黃州-黃州停車場, 新義州-麻田洞, 海州-龍塘浦)를 건설할때도 경인로는 포함되지 못하였다.


경인로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에 실시한 제1기치도사업기간(治道事業期間)인 1914년에 크게 개수되었다. 이어서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준공되자 경인로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일제로서는 경인로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서울과 최대 무역항인 인천을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경인로를 1등 도로로 분류하고 연도면민(沿道面民)으로 하여금 수시로 자갈과 모래를 깔아 노면을 양호하게 유지하도록 강요하였다. 1930년에 이르면 서울과 영등포 사이의 도로는 폭이 30미터로 확장되고 노면도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경인로는 1등 도로이기는 하였지만 포장될 정도는 아니었다.


경인로는 자동차 운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요성이 더해졌다. 경인자동차주식회사는 영등포-인천 사이에 여객수송 영업을 개시하고, 조선운송주식회사는 화물수송 영업을 시작했다. 1923년 10월부터 서울-양평 사이에 자동차가 매일 운행되고, 1928년 6월부터는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자동차가 매일 12회 왕복하였다. 그리고 1929년 3월부터 서울-월미도 사이의 버스영업이 개시되었다. 서울-인천 사이의 운임은 95전이었다.


1933년 12월 경성전기주식회사는 경인자동차주식회사로부터 경인승합자동차사업을 인수하고, 서울-인천, 인천-주안 노선에서 자동차를 운행했다. [그림6-3]은 1936년 당시의 버스 운행 노선을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듯이 경인선은 영등포출장소-영등포역앞-구로리-오류동-소사-부평-주안-인천운동장 앞-어시장통-경성전기 버스출장소 앞에 이르렀다. 이곳으로부터 제1철교앞-인천역 앞-월미도선과 접속했다. 그리고 주안선은 경인선 중에서주안 - 경성전기 버스정류소 앞이었다.

  • 경인선
    • 구간 : 영등포 - 인천, 30.5킬로미터
    • 운임 : 1구간 6전, 경인선은 8구간
    • 소요시간 : 1시간 26분
    • 사용차량 : 20인승 8대, 35인승 1대
    • 운행회수 : 편도 1일 12화, 시발 -영등포 08:00, 인천08:30, 종발 - 영등포 17:00, 인천 17:30
  • 주안선
    • 구간 : 인천 - 주안, 6.8킬로미터
    • 운인 : 1구간 6전, 주안선 3구간
    • 소요시간 : 35분 사용차량 : 20인승 3대
    • 운행회수 : 편도 1일 15회, 시발 - 인천 08:00, 주안08:27, 종발 - 인천 18:50, 주안 19:17
    • 운임 : 1구간 6전, 경인선은 8구간
    • 소요시간 : 1시간 26분
    • 사용차량 : 20인승 8대, 35인승 1대
    • 운행회수 : 편도 1일 12화, 시발 -영등포 08:00, 인천08:30, 종발 - 영등포 17:00, 인천 17:30

193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자동차 운수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전쟁과 국토의 분단으로 산업시설과 자동차가 파괴되어 교통의 수요와 역할이 감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의 통행이 막혀 한강주운이 두절되자 경인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정부는 1958년 5월에 서울-인천과 서울-부산의 국도를 완전히 포장하였다. 서울시는 1966년 11월 26일 영등포구청에서 오류동에 이르는 구간을 경인로라 명명했다. 그후 경인로는 노폭과 기점 종점에서 몇 차례의 조정을 거쳤다. 오늘날의 경인로는 1984년 11월7일에 지정된 것으로서, 영등포 1가 97번지 영등포로터리에서 문래동로터리와 개봉동을 지나 구로구 항동 산 10번지 오류동시계(市界)에 이르는 노폭 35미터, 연장 거리 9,000미터의 길을 말하며, 일반국도 46호선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 도로는 경인고속도로경인철도와 더불어 한국의 심장부인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로서, 경인지방뿐만 아니라 한국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사회간접자본이다.


경인로는 영등포구 영등포동 3가, 문래동 2가, 구로구 신도림동, 구로 1동, 고척 1동, 개봉 1동, 오류동에 걸쳐 있다. 경인로의 기점일대는 공장지대로서 한국경제의 활력을 느끼게 만든다. 구로구내의 경인로 주변에는 대성산업, 삼영화학공업, 종근당제약, 구로특수기계공구상가, 남부자동차검사소, 제일제당, 동양공업전문대학, 오류여자중학교, 교통안전진흥공단, 철도청중앙보급사무소, 한국타이어, 오류동우체국, 일신산업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경인로가 안양천을 건너는 곳에 고척교가 가설되어 있고, 경인로와 평행선으로 달리는 경인선상에 온수역, 오류역, 개봉역, 구일역, 구로역, 신도림역 등이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고척교는 원래 가린열다리라고 불리어 왔는데, 이 말에 한자(漢字)를 붙여서 갈탄교(葛灘橋)라고 표기한 듯하다. 강 주변에 칡넝쿨이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일부에서는 갈탄교를 만탄교(萬灘橋)로 잘못 읽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고척교라는 이름은 고척동에서 따온 것이다.

남부순환로 (南部循環路)

남부순환로는 영동대로와 교차하는 대치교를 기점으로 하고, 서울의 남부지구를 동서로 횡단하여 강서구 김포국제공항 입구 사거리에 이르는 폭 22미터, 길이 29.4킬로미터에 이르는 간선도로이다. 남부순환로라는 이름은 1978년 6월 29일에 붙여진 남부순환도로라는 데서 연유한다.


남부순환로가 지나는 지역은 강남구 대치동 · 도곡동, 서초구양재동 · 서초동 · 방배동, 관악구 사당동 · 봉천동 · 신림동, 금천구독산동, 구로구 가리봉동 · 개봉동, 강서구 신월동 · 외발산동 · 공항동등이며, 도중에서 영동대로 · 삼성로 · 선릉로 · 언주로 등 27개 도로와 교차 연결된다.


남부순환로는 그 길이가 길고 많은 구를 관통하기 때문에 주변에 각종 시설과 주택단지를 거느리고 있다. 이 도로가 개통된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도로의 주변에는 논과 밭이 많아 혼자서는 접근하기가 무서울 정도였으나, 지금은 자동차가 항상 꽉 차있을 정도로 교통의 간선으로 바뀌었다. 구로구내의 남부순환로 연변에는 매봉초등학교, 두산아파트, 원풍아파트, 대림여자중학교, 영일초등학교, 개봉아파트, KBS송신소, 서울전동차사무소 등이 들어서 있다. 남부순환로가 안양천을건너는 곳에는 안양교가 가설되어 있고, 경인로와 만나는 곳에는 오류인터체인지가 설치되어 있다.

가마산길

가마산길은 구로 5동 44-37 도림천에서 구로구청을 지나 구로 5동 426-167에 이르는 노폭 30미터 길이 950미터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가마산길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84년 11월 7일이었고, 그 연유는 종점 부근에 가마고지라는 옛 지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마산길의 주변에는 관청과 학교 등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 길의 기점인 도림천은 영등포구와 구로구의 경계를 이르면서 안양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구로구에 위치한 공장들은 한강과 두 하천의 물을 많이 이용한다.


가마산길 연변에는 구로경찰서, 애경산업주식회사, 고려대학교구로병원, 구로중학교, 구로중앙시장, 구로초등학교,구로구청, 동구로초등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개봉로 (開峰路)

개봉로는 개봉 1동 333-1 개봉동 321에서 원풍아파트를 지나 개봉 3동 359-31개봉교에 이르는 노폭 25미터 길이 1,250미터의 길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길은 경인로에서 분기하고 개봉동을 동남방향으로 관통하여 경기도 광명시에 이른다.


개봉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884년 11월 7일 이었고, 그 이유는 관통하는 지역의 대부분이 개봉동이었기 때문이다. 개봉동은 구로구의 서부에 있는 구로서 큰 주택가를 이루고 있다. 전에는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이었으나 소사읍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경인선상에 개봉역이 생김으로써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개봉로의 주변에는 삼화아파트, 원풍아파트, 개봉초등학교,개봉제일종합쇼핑, 개봉아파트, 한국통신개봉전화국 등이 위치하고있다.

구로동길

구로동길은 신도림동 602-9 구로공구상가에서 구로동 사거리 가리봉동을 지나 독산 1동 152-9에 이르는 노폭 20미터 길이 3,800미터의 길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길은 경인로에서 분기하여 구로구의 중앙을 동남 방향으로 관통하며 남부순환로와 교차하여 서울과 수원을 잇는 일반국도 1호선과 접속된다. 그리하여 경기의 서부와 남부를 이어 주고 있다.


구로동길이라는 이름은 1972년 11월 26일에 붙여진 구로로라는 데서 연유했다. 이때는 가리봉동 79번지에서 구로소방서를 지나 구로동 581번지 구로역 앞에 이르는 노폭 20미터 길이 2,600미터였다. 1984년에 종점을 1,200미터 연장하고, 기점과 종점을 바꾸어 구로동길로 명명하였다.


구로동길은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 경기도 광명시와 접하고 동쪽은 마장천을 경계로 하여 대방동에 접한다. 또 경인선과 경부선이 갈라지고 지하철 조차장(操車場)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구로동길의 연변에는 금성사, 동국무역, 효성물산, 원림산업, 신세계백화점, 구로역, 애경유지, 구로소방서, 중앙시장, 국일극장, 가리봉시장, 영일초등학교, 강서초등학교 등이 있다.

공단로

공단로는 구로 3동 179-85 구로 1교에서 구로 제1공단을 지나 가리봉 2동 550-9 철산교에 이르는 노폭 20미터길이 2,100미터의 길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길은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구로 3동 가리봉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남부순환로 상에서 구로동길과 교차하여 경기도 광명시에 이르는 길이다.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수송하는 산업도로이다.


공단로라는 이름은 1981년 1월 21일 제정되었는데,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기수인 구로공단에서 연유되었다. 이 길의 출발점이 바로 구로 제1공단이었고, 통과 지역이 제2 제3공단이었다. 구로공단의 특징은 도시형 공업체가 많고 섬유 전자 공장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단로의 주변에는 한국종합물산, 삼화완구, 오리온전자, 아남정밀, 안양모방, 한국지퍼, 생산기술연구원, 신영스타킹, 협진양행, 코오롱상가, 금성전선, 성당수녀원 등이 들어서 있다.

고척동길

고척동길은 고척 2동 189번지에서 오류초등학교를 지나 오류 2동 6-42 경인로에 접속하는 노폭 20미터 길이 2,390미터의 길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길은 고척 2동, 개봉 1동, 오류동에 걸쳐 있으며 강서로와 경인로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고척동길이라는 이름은 1984년 11월 7일 붙여졌다. 도로의 인근에는 지석묘가 있고, 서림아파트, 고척시립도서관, 고척근린공원, 오류초등학교, 덕의초등하교, 오류시장, 세곡초등학교 등이 있다.

강서로

강서로는 내발산동 96번지 공항로와의 교차점에서 화곡동 까치산 신정동을 지나 구로구 고척동 76번지에이 르는 노폭 30미터 길이 5,200미터의 길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길은 김포지역과 구로구 공단지역을 연결시켜주는 간선도로라고 할 수 있다.


강서로라는 이름은 1979년 1월 30일에 붙여졌는데, 그 이유는 이길이 강서구의 중앙을 서남 방향으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의 강서로는 강서구 내발산동 원당사거리에서 까치산 신정동을 지나 구로구 고척동 202번지에 이르는 길이 7,300미터의 길이었다.


강서로의 인근에는 유신빌라, 고척우체국, 서울가든아파트, 연합철강, 우성아파트, 동양공업전문대학, 고척쇼핑센터 등이 들어서있다.

도림로

도림로는 문래동 2가 35-2 영등포 초등학교에서 신길광장을 지나 구로 4동 305-22 구로 사거리에 이르는 노폭 25-30미터 길이 4,000미터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영등포구 남쪽에서 도림천 안양천을 건너 ㄱ자형으로 구로구 수출산업공단 쪽으로 이어진다.


도림로라는 이름은 1984년 11월 7일 붙여졌는데 이 길이 지나는 도림동의 동명에서 연유했다. 도림로 인근에는 구로시영아파트, 성락아파트, 이화아파트, 럭키구로아파트, 영서중학교, 구로시장 등이있다.

철도

경인철도

  • 가. 부설권의 향방
    • 경인철도는 한국에서 맨 처음 부설된 철도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한국의 자본과 기술로 한국인이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일본인이 부설한 철도이다. 경인철도는 26마일에 불과한 짧은 철도였지만,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서울과 인천을 직통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는 사활적(死活的) 의미를 지닌 간선철도였다. 따라서 이 철도를 누가 언제 어떻게 부설하느냐의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중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청일전쟁기부터 러일전쟁기에 걸쳐 경인철도를 둘러싸고 열강들이 벌인 각축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1984년)의 실패는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한국에서 청의 세력이 강화되고 일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일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이후 10년 동안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한국에서 동학농민전쟁(1894년)이 일어나고, 청이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3천여 명의 진압군을 파견하자, 이에 대항하여 6천여 명의 군대를 경인지역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한밤중에 경북궁을 침략하여 친일정권을 세우고 조일공수동맹(朝日功守同盟)과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체결했다. 경인철도의 부설권문제는 1894년 8월 20일에 강제로 체결된 조일잠정합동조관에 언급되어있었다. 즉 제2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 내정개혁의 절목(節目) 중 경부양지(京釜兩地) 및 경인양지(京仁兩地) 간에 건설할 철도일사(一事)는 조선정부가 아직 재정의 여유가 없음을 고려하여, 일본정부 혹은 일본의 어느 회사에 약정하고, 시기(時機)를 보아 기공할 것을 원한다. 그러나 목하위곡정절(委曲情節)이 있어서 그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 그러므로 양법(良法)을 안출(案出)하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정약(訂約)기공(起工)에 이를 것을 요한다.
    • 요컨대 한국정부가 경인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잠정적으로 일본에 허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1년만에 급변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3억 냥의 배상금과 타이완과 랴오뚱 반도를 빼앗았다. 그러나 중국에서 일본세력이 증대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힘을 합쳐 일본에게 랴오뚱 반도를 청에 돌려줄것을 요구했다. 소위 삼국간섭이다. 삼국간섭은 한반도에도 곧 영향을 미쳤다. 1895년 5월 4일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4국 공사들은 합동으로 한국정부에 공문을 보내어, 철도 등의 이권을 일본에게만 허급하는 것은 한국과 타국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항의하였던 것이다.
    • 일본세력의 침투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한국정부는 열강의 항의를 적절히 이용하여, 일본에게 경인철도의 부설을 허가할 수 없음을 통고하였다. 그리하여 경인 경부철도의 기공을 위해 노선답사까지 마쳤던 일본의 야욕은 일단 좌절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 그런데 국제정세가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1896년 3월 29일 미국인 모스(J.R. Morse)에게 주어졌다. 모스는 이전부터 미국공사 알렌(Alen)을 통하여 한국의 간선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던 중 1895년 10월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계기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또 열강의 압력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의 시행이 연기된 틈을 타서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손에넣었던 것이다.
    • 한국정부와 모스가 체결한 경인철도 특허약관의 제9조에는 특허를 받은 날로부터 12개월 이내에 기공하고, 그후 3년 내에 준공하며, 이를 위반할 때는 특허의 효력이 상실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한편 한국정부는 1896년 7월17일 칙령 제31호로 국내 철도규칙을 발포했다. 이의 제3조에는 국내에 건설하는 각 철도의 폭은 4피트 8인치 반으로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그후 한국 간선철도의 폭이 표준궤를 택하는 데 계기가 되었다.
    • 모스는 인천에 거주하는 미국인 타우센드와 조합을 결성하고, 클브란을 기사장(技師長)으로 삼아 선로의 측량을 마쳤다. 그리고 서울과 인천 양쪽에서 공사를 시작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르면 전로선을 건설하는 데 1년, 한강교량을 가설하는 데 2년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1896년 3월 22일 경인가도의 우각현(牛角峴)에서 350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모스의 분주한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내에서의 자본조달이 어려워 전선의 완성은기대할 수 없었다.
    • 한편 한국에서 우세한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인철도의 장악이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느끼고 있던 일본정부와 자본가들은 모스가자금난에 봉착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인철도부설권을 매수하기 위해기민하게 활동하였다. 경부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이미경부철도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일본의 대표적정상자본가(政商資本家)들인 이와사키(岩崎) 이쓰이(三井)시부사와(澁擇) 오오쿠라(大倉) 야스다(安田)등은 1897년 5월 4일경인철도인수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시부사와 등이 앞장서서 모스와협의를 계속한 끝에 동년 5월 8일경인철도양수계약(京仁鐵道讓受契約)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철도의시설과 장비는 모스가 모두 조합에 인도하고, 조합은 그 계약금으로5만불(약 10만 4천 엔)을 모스에게 지불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모스는 곧 기탁금을 30만부로 올려 줄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여 러 불 영 등의 자본가에게경인철도의 부설권을 매각하겠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는 이 철도가외국자본의 손으로 넘어간다면 다시 회복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정부 보증하에 요코하마정금은행(橫賓正金銀行)이 모스에게 10만 엔의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부설공사는 종래대로 시행할 것을 확인했다.
    • 그후 모스는 프랑스의 신디케이트 대표자 그리예로부터 경인철도를3백만 엔에 양수하겠다는 제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다시 계약의파기를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국가의 체면과 대한정책(對韓政策)의중요성을 내세워 모스의 철도 매각을 중지시키는 한편, 1898년 10월부터본격적으로 이 철도의 매수 작업에 들어갔다. 1899년 1월 31일경인철도인수조합과 모스 사이에 정식으로 경인철도의 양도계약이체결되었다.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은 이에 필요한 자금180만 엔을 일본정부가 조합에 대하(貸下)하도록 의결해주었다.
    •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한국정부의 의사와는전혀 관계없이 미국인 브로커와 일본인 정상재벌 사이의 매매계약에따라 일본으로 넘어갔다. 자주독립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나. 부설공사의 경과

    경인철도를 매각한 시점에서 철도공사는 선로의 토공공사가반쯤 진척되어 있었고, 한강교량도 2개의 교대(橋臺)와 3개의교각(橋脚)이 축조 중이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모스의 공사를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1899년 4월 8일부터 토공공사에 착수하고, 동원23일에는 인천에서 새롭게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조합을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꾸었다. 1899년 5월 15일 부로 출발한 이 회사는자본금 72만 5천 엔에 사원 15명이었다.

    경인철도합자회사는 인천으로부터 서대문에 이르는 전 구간을 4공구로나누어 공사를 진행했다. 경인철도의 전 구간은 일본의 토목건설업체인카지마구미(鹿島組)가 시공했으며, 건설기간은 인천 - 노량진 사이의선로공사에 6개월여, 한강교량공사에 1년 3개월여, 한강 - 남대문공사에 1개월여가 소요되었다. 각 구간의 공사현황을 약도로 표시하면 [그림 6-15]와 같다.

    경인철도의 부설공사가 완료되어 인천정거장에서 개통식을 거행한것은 1899년 9월 18일이었다. 개통 당시의 열차운행은 인천과노량진에서 오전 오후 각각 1회씩 발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편도를완주하는 데는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한강철교가 완공되지 않았을때는 노량진에서 한강변까지 인거철도(人車鐵道)를 가설하여 여객의불편을 덜어 주었다.

  • 다. 토지수용에 대한 저항
    • 한국정부와 일본이 맺은 조약에는 경인 경부 철도의 부설과 운영에필요한 토지를 한국정부가 일본측에 무상으로 제공하도록 정해져있었다. 그렇지만 양 철도의 부지 속에는 당연히 민간인 소유지가 많이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토지는 결국 정부가 매수하여 제공할 수밖에없었는데, 토지의 매수와 대금의 지불을 둘러싸고 마찰이 발생할 소지가벌써부터 충분하였다.
    • 먼저 경인철도부터 살펴보자. 한국정부의 경인철도감독이채연(李采淵)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노량진 강두(江頭)로부터제물포까지 철도에 범입한 전답의 가격은 3만 3,934원 24전이었다.그리고, 서울 남대문 밖 정거장의 철도용지 가격은 4,029원 36전, 인천부두 정거장의 외국인 사유지 가격은 8,390원 70전이었다. 이를 모두합치면 4만 6,354원 26전이었다. 그밖에 경인철도에 범입되어 훼철당한민가가 서울 부근에 257호 3만 8,198원, 인천 부평 시흥 양천 과천5군에 43호 5,375원이었다.
    • 그런데 이들 토지와 가옥에 대한 보상은 철도부설이 완공되어운수영업을 개시한 후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천 부평 양천과천 시흥등지의 군민들은 토지와 가옥의 보상을 농상공부에 강력하게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이 궁핍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이를수년 동안 연기했다. 이에 대해 연선주민들이 매년 거세게 항의하였음은물론이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철도가 개통된지 7년여가 지난 1907년11월 15일에서야 경인철도용지 배상금을 아래와 같이 지급하기로결정했다.
      경인철도용지 배상금 안내 - 교부기일, 교부장소, 토지소재군 순으로 내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부기일 교부장소 토지소재군
      11월 20일 영등포 시흥
      11월 21 - 22일 소사(素砂) 부평
      11월 23 - 24일 유현(杻峴) 인천

      이때 분묘 및 가옥에 대해 지급된 이전비는 1기 당 2원 50전, 매간 당20원이었다.

  • 라. 경부철도에의 합병
    • 경인철도는 원래 경부철도 계획의 부산물로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양자는 그 기능으로 보아 주종(主從) 혹은 형제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양자사이에 통일경영의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는 않았다.
    • 그런데 1901년 8월 21일 영등포에서 경부철도의 북부 기공식이거행되고, 또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재료의 수송 등을 위해영등포정거장의 공동사용 등의 문제가 제기되자 양사의 간부들은 두철도의 총일경영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3년 10월 31일경부철도주식회사가 경인철도합자회사에 64만 1천 5백 80엔 70전을지불하는 대신 정부연부반납금(政府年賦返納金)과 권리의무를 계승하는것을 골자로 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경부 경인철도는 이제명실공히 하나의 경영조직 속에 편입되어 일본의 한국침략을 선도하는동맥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
  • 마. 일제하의 운수영업
    • 일본이 한국에 부설한 철도는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지배를관철시키는 핵심적 교통기관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철도에 대해여러 가지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았다. 먼저 일제시대의 한국철도의운수영업을 개관하면 [표 6-1]과 같다.
      일제하의 운수영업 안내 - 종별 년도, 농산품, 임산품, 광산품, 수산품, 공산품, 기타, %, 지수, %, 지수, %, 지수, %, 지수, %, 지수, %, 지수 순으로 내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종별 년도 농산품 임산품 광산품 수산품 공산품 기타
      % 지수 % 지수 % 지수 % 지수 % 지수 % 지수
      1910 22.0 100 8.3 100 21.9 100 4.0 100 7.8 100 36.0 100
      14 27.3 189 7.9 145 22.8 159 6.2 240 8.1 159 27.5 116
      18 28.0 422 8.3 331 18.0 274 7.7 649 12.7 541 25.3 233
      22 23.6 517 10.9 631 17.1 377 4.5 551 10.8 668 32.2 446
      26 32.2 36 8.1 624 18.0 528 4.8 786 14.1 1,159 22.8 404
      30 26.2 886 7.9 710 21.0 714 3.7 701 15.8 1,515 25.3 524
      34 25.8 1,129 7.2 987 27.7 1,220 4.4 1,066 16.8 2,080 16.8 450
      38 16.2 1,288 8.9 1,856 31.8 2,538 2.9 1,303 17.4 3,909 22.8 1,103
      42 9.9 1,471 9.0 3,549 37.8 5,665 2.2 1,837 8.1 3,432 33.0 2,999
      44 7.9 1,396 5.5 2,569 37.4 6,638 2.7 2,655 7.8 3,907 38.7 4,161
    • 한국철도의 운수상황은 1930년대 중방을 경계로 하여 크게 변하였다. 운수 수입에서 1910 - 25년은 여객수입이 화물수입을 소폭으로 능가하고, 1926-37년은 양자가 균형을 이루었으며, 1938-45년은 여객수입화물수입을 대폭 상회하였다. [표 6-1]에서 보듯이, 화물구성에서 전기(前期)는 농산품 22-32%, 광산품 17-28%, 공산품 8-17%, 임산품 7-11%이었지만, 후기(後期)에는 광산품 32-38%, 공산품 8-17% 농산품 8-17%, 임산품 6-9%이었다.
    • 한국 유수의 생산지와 소비지 및 무역항을 연결하고 있던 경인선의 운수영업은 한국 철도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경인선의 중간에 위치한 구로지역에는 개통 당시부터 오류동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류동역은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에 위치하고, 부근은 소사영등포 등지와 교통이 편리했다. 그러나 오류동은 경인가도에 면한 한촌(寒村)에 위치하고 구릉기복(丘陵)이 있어서 볼 만한 산물이 없었다. 오류동역의 여객과 화물 수송을 통하여 이 지역의 교통운수 및 사회경제적 모습을 살펴보자.
    • 1910년 시기의 오류동역 소재지에는 헌병 출장소가 있었다. 인구는 한국인 59호에 278명, 일본인 10호에 38명이었다. 오류동역의 영업성적은 승차인원 3,764명, 하차인원 3,841명 발송화물 237톤, 도착화물 21톤, 객차수입 1,139원, 화차수입 182원이었다. 주요 발송화물은 쌀59톤, 과일 11톤, 목재 98톤, 도착 화물은 비료1톤이었다.
    • 1913년 단계의 오류동역 소재 인구는 한국인 호수 63, 인구 358, 일본인 호수 16, 인구 48이었다. 영업성적은 승차인원 11,828명, 하차인원 11,543명, 발송화물 772톤, 도착화물 278톤, 객차수입1,835원, 화차수입 432원이었다. 주요 발송화물은 쌀 73톤, 채소 32톤, 과일 19톤, 목재 18톤, 석재 633톤, 도착화물 소금 10톤이었다. 승객의 왕래가 빈번한 구간은 남대문과 영등포였다. 부근의 주요 생산물은 벼 2,130석, 잡곡 650석, 참외 300타(馱), 수박 2,500관이었다. 일제가국권을 강탈한지 불과 3년만에 오류동역의 화물수송이 괄목할만하게 증가한 것은 물자의 수탈이 그만큼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 1927년의 오류동역 소재지의 인구는 한국인 1,512호 4,417명, 일본인15호 23인이었다. 영업성적은 승차인원 42,724명, 하차인원 42,638명, 발송화물 780톤, 도착화물 937톤, 객차수입 8,049원, 화차수입1,095원이었다. 역에는 6명이 근무했다. 화물의 발착에서 보는 한오류동 지역은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쌀과 채소가 주요 산물이었다. 승객은 주로 서울과 인천에 왕래하는 근거리 손님이었다.
    • 참고로 일제시대에 오류동역이 이룩한 운수성적을 정리하면 [표6-2]와 같다.

      [표6-2] 일제시대 오류동역의 운수실적

      일제시대 오류동역의 운수실적 안내 - 연도, 역객인원, 수하물, 화물, 운수수입, 승차, 하차, 발송 개수, 발송 중창, 발송 톤수, 도착 톤수, 여객 수,입, 화물 수입, 합계 순으로 내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연도 역객인원 수하물 화물 운수수입
      승차 하차 발송 개수 발송 중창 발송 톤수 도착 톤수 여객 수,입 화물 수입 합계
      1911 5,236 5,209     107 3,574 1,223 116 1,339
      1912 10,740 10,749     177 103 1,491 136 1,627
      1914 9,311 9,575     141 86 1,546 137 1,683
      1915 9,871 9,741     186 101 1,610 192 1,802
      1916 12,873 12,446     144 507 2,187 162 2,349
      1917 14,995 15,130     229 190 2,491 231 2,722
      1918 21,478 22,531     203 148 3,661 191 3,852
      1919 25,985 27,250     213 853 4,847 164 5,011
      1924 42,532 43,240     669 864 7,261 815 8,436
      1925 42,532 42,149     510 693 7,875 550 8,425
      1926 42,724 42,638     780 937 8,049 1,095 9,144
      1927 38,865 38,502 173 7,562 1,148 1,082 7,814 1,211 9,025
      1928 37,021 37,185 143 5,980 886 1,098 7,331 1,120 8,451
      1929 40,655 41,390 144 6,057 1,116 934 8,236 1,346 9,582
      1930 40,397 39,884 175 4,677 846 1,831 8,887 760 9,647
      1931 38,853 38,981 157 3,619 718 3,252 8,272 798 9,070
      1932 39,107 39,871 138 2,766 555 12,699 8,706 921 9,627
      1933 42,010 42,306 133 2,954 1,277 7,400 8,902 1,476 10,378
      1934 45,194 48,806 180 3,916 617 998 9,552 1,577 11,128
      1936 61,606 64,993 274 6,349 531 1,803 12,775 2,457 15,232
      1937 56,199 57,814 323 6,916 332 1,127 12,656 1,326 13,981
      1938 82,060 49,167 371 7,426 712 1,794 15,340 5,978 21,318
  • 바. 해방후의 경인철도
    •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철도에 종사하는 한국인과 일본인 대표들은 철도업무을 인계인수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했다. 당시 한국인 종사원은 약 7만인, 일본인 종사원은 약 3만인이었지만, 철도운영을 기획하고 종합할 수 있는 핵심부서는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해방 당시의 한국철도의 영업킬로미터는 6,362킬로미터, 기관차수는 1,166량, 역수는 762개였다.
    • 해방과 동시에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자 민족과 국토는 곧바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리고 38선은 국경으로 굳어져갔다. 그 결과 한국철도는 1945년 9월 11일부터 남북한 사이의 철도운행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남한에 속하게 된 영업킬로미터는 2,642킬로미터, 기관차수는 488량, 종업원은 55,960명이었다. 인원을 제외한 철도시설은 북한 쪽에 훨씬 더 많이 남겨졌다.
    • 미군정청은 1945년 9월 9일 군정명령 제33호를 발포하여 일본기관과 단체 및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재산을 미군정청에 귀속시켰다. 철도도 여기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후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1948년 9월 11일 한국과 미군정은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을 체결하여 미군정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한국정부에 이관하였다. 철도가 비로소 한국정부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정부는 1945년 10월 27일 일본인 종사원을 총사직시키고 철도를 한국인의 힘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동란은 철도에게는 미증유의 시련을 몰고 왔다. 정부는 곧 전시수송체제로 전환하고 수송본부를 설치했다. 6월 28일에는 한강인도교 및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고육지책을 썼다. 그러나 수도와 수송본부는 부산까지 밀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후 유엔군의 반격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자 정부는 1950년 9월 16일 철도복구를 부산항으로부터 인천항으로 출동시켜 철도의 복구에 나서도록 했다. 그리하여 19일부터는 인천-부평간의 열차가 운행을 개시하고, 28일에는 인천-영등포간의 군수열차가 운행되게 이르렀다.
    • 그러나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주게 되자 정부는 서울철도국과 수송본부를 천안으로 옮겼다. 그 후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자 정부는 1952년 3월 15일수송본부를 영등포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곧 경인선을 개통하였다. 파괴되었던 한강교량은 4월 5일 임시로 복구 준공하였다.
    • 6.15전쟁은 철도에 심대한 피해를 끼쳤다. 철도시설의 파괴율은 터널6%, 궤도 7.5%, 신호 및 보안장차 20%, 급탄설비 40%, 전기신호 장비56%, 역건물 41%, 공장설비 27%, 기관차 51%, 교량 12%, 노반 3%,급수시설 25%, 전신전화 시설 50%, 전력설비 56%, 선로 부대 건물 39%, 자재 80%, 객차 50%, 화차 34%이었다. 피아의 공방전이 치열하였던 경인선의 피해율은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였다.
    • 철도피해의 복구는 재빨리 진행되었다. 1951년 7월 15일에는 유엔군이 디젤 기관차를 도립하고 모든 구간이 정상운행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1955년 8월 15일을 기해 동란 이후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던 철도의 운영권을 한국정부가 인수하였다.
    • 그런데, 경인선 특히 구로지역과 관련된 철도건설에서 특기할 만한것은 오류동선의 건설이다. 1957년 9월 26일 착공하여 1959년 5월 30일 준공된 오류동선은 경인선의 오류동역에서 분기하여 경기도 부천군소래면 옥길리에 이르는 4.5킬로미터의 철도이다. 아이시에이(ICA)의 원조 자금으로 부설된 이 철도는 옥길리에 건설되는 경기화학주식회사의 석회석 분말 비료원료와 생산제품 및 연료를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이 회사의 생산물은 월 8,000톤에 달하였다. 이 철도는 지금 도산업선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 전쟁의 피해로부터 복구가 완성되어감에 따라 경인선은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경인지역에 인구가 집중하게되니 자연히 출퇴근 승객 때문이었다. 그 일환으로 1965년 9월 15일에는 오류동 역사가 신축 준공되었다. 그리고 1965년 9월 18일에는 경인선의 복선이 개통되었다. 영등포-인천 간 28.9킬로미터에 이르는 복선 공사는 서울의 인구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8년의 서울 인구는 433만명이었고, 1980년의 그것은 5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 1968년 2월 1일 경인선의 서울-동인천 간의 열차 운행 시간은 종래보다 10분을 단축하여 45분에 주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1년 9월 15일에는 종래의 운행시격을 30분에서 20분으로 단축하였다. 또 객차와화차를 분리하여 운행하였다. 이것은 경인선이 연선 지역을 서울의 출퇴근권 내지 베드타운으로 확실하게 장악해가는 모습이었다. 경인선의 성격 변화는 결국 새로운 철도운영방식 즉 전철의 도입을 촉진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경부철도

  • 가. 일본의 부설권 장악
    • 일본이 경부철도를 부설해야 한다고 구상한 것은 1880년대부터였지만, 이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은 1890년대 초였다. 1892년 일본군 참모차장 카와카미(川上操六)는 다음과 같은 뜻을 피력했다.
    • 일조(一朝)에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군대 군수품 등을 선운(船運)에 의해 수송하는 것은 해상권의 관계상 우선 곤란하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이를 부산으로부터 상륙시켜 경성방면으로 수송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의 손으로 경부간에 철로를 부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부산주재 총영사 무로다(室田義文)에게 경부철도 노선을 답사할것을 명령했다.
    • 일본의 경부철도 부설 구상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최우선의 대한정책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상은 경인철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조일잠정합동조약을 통해 일단 실현시킬 수 있었다.
    •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잠정적으로 손에 넣은 일본은 이를 실제적인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한국을 반식민적 보호국가로 만들기 위해 부임해 온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1894년 11월에 일본정부에제출한 약정안(約定案) 초안의 골자는 경인 경부철도를 일본정부나 일본회사가 건설하고, 철도공사와 부지매입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일본이 한국에 부채로 제공하며, 양 철도의 영업권은 부채상환이 끝날때가지 일본이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이러한 의견을 제안하면서 철도부설권의 허급을 영토의 할양과 똑같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달래기 위해서는 차관의 굴레를 들러씌어 한국 정부의 사업이라고 속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 한편 일본정부는 청일전쟁 중에 잠정합동조약을 확정조약으로 만들기 위해 일한조약초안(日韓條約草案)이라는 비밀조약의 체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조약안의 골자는 경인 경부철도를 일본의 자본으로 건설하고 한국정부가 이를 모두 상환할 때까지 일본이 운수영업의 모든 권리를 장악하되, 전로선 개통 후 50년을 경과하지 않으면 대조선국정부는 건설제비용의 상환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최소한 50년 동안은 경인 경부철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의도였다.
    • 일본정부와 이노우에의 초안은 결국 하나로 조정되어 한국정부에 전달되었다. 1895년 1월 15일 제출된 경부 경인철도 세목협정교섭안의 골자는 철도의 형식적 소유권은 한국정부가 가지되, 한국정부가 건설제비용을 상환할 때까지 최소한 50년간은 일본이 운수 영업의 모든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 일본정부의 세목안은 한국정부와 한국민의 저항에 부딪쳐 일단 좌절되었다. 경부철도의 노선이 통과하게 될 경기도, 충정도, 경상도에서는 동학농민군에 의한 항일투쟁이 전개되고 있어서 1894년 11월에 실시된 경부철도 노선의 2차 답사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 4개국 공사들도 일본에 철도 이권을 독점적으로 양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 한국정부의 거부에 직면한 일본정부는 의병이 진정될 때까지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타국에 양도하지 않겠다는 비밀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태도는 완강하였다. 일본정부는 결국 무력시위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서는 경부철도부설권의 탈취가 불가능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일본은 열강세력 특히 러시아와의 대립을 극복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경부철도에 접근하는 우회수단으로서 미국인 모스가 차지하였던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매수하고자 했다.
    • 일본은 먼저 러시아에게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제시했다. 즉 러시아가 한국에서의 일본의 상업상 공업상의 우위를 인정한다면 일본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이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양국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1898년 니시(西) 로젠협정을 체결했다. 국제 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반전시킨 일본은 세목협정의 체결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주한 공사 가토오(加藤)는 일본정부에 군함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한국정부에 대해서는 잠정합동조관의 권리에 따라 선택하는 바의 적당한 시기와 방법에 따라 철도부설에 착수할 것임을 통고했다. 때마침 청을 방문하고 있던 이토오(伊藤博文)는 한국을 방문하여 고종(高宗)을 알현하고, 벽에 부딪친 경부철도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으로부터의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일양국의 교섭은 급진전되어 1898년 8월 8일 마침내 경부철도 합동조약이 체결되었다.
    • 이 조약의 내용은 일본이 몇 차례 제시했던 협정초안에 한국정부의 요구를 몇 가지 첨가한 것이었다. 일본측의 제안은, 철도부지를 한국이 무상으로 제공할 것, 철도용품과 영업이익에는 과세하지 말 것, 완공 후 15년간은 일본이 영업권을 전유(專有)하되 한국이 이를 매수하지 못할때는 10년씩 연장할 것 등이었다. 한국측의 제안은, 강교(江橋)는 사람이 선박이 통행할 수 있도록 인도를 병설하고 고가(高架) 또는 개폐식(開閉式)으로 할 것, 궤간을 표준궤로 하고 분묘(憤墓)를 파괴하지 말 것이며 한국의 군용품 · 군대 · 우편물 등의 수송은 무임으로 할 것, 정거장에서의 외국인 거주를 불허할 것, 철도 노동자는 한국인을 9할 이상 고용할 것, 3년 이내에 착공하여 10년 이내에 완공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조약을 무효로 할 것, 한국인 또는 한국인 회사는 언제든지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주주가 될 것, 이 철도는 여하한 경우라도 제3국인에게 양도하지 말 것 등이었다.
    • 이 조약의 핵심은 철도부설권과 영업권을 일본이 전유하고 철도용지를 한국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도록 규정한 데 있었다. 이것은 경부철도의 부설과 운수영업의 전 과정에서 허다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암적인 조항이었다.
  • 나. 부설공사의 경과
    • 일본정부와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경부철도의 노선을 선정하기 위해 1892년부터 1904년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선로예정지를 답사했다. 매번의 답사마다 노선을 선정하는 기준과 방침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목적은 일본이 경부철도 하나를 장악함으로써 한국의 남부지역을 독점적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데 있었다. 즉 경부철도 하나를 장악함으로써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화하고 대륙침략을 감행하는데 유용한 동맥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경부철도 노선을 일본의 이와 같은 방침이 종합적 구체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 경부철도주식회사는 1901년 8월 20일 서울 방면의 영등포에서 그리고 동 9월 1일 부산 방면의 초량에서 각각 기공식을 거행했다. 경부철도 부설공사의 구간별 진행과정은 지면관계상 설명할 수 없지만 구로지역과 관련이 있는 북부지역의 영등포-명학동(鳴鶴洞) 구간에대해서만 약술하겠다. 이 구간의 거리는 18.7킬로미터로서 1901년 9월부터 1902년 12월까지 공사가 실시되었다. 영등포역에 북부건설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건설공사를 담당한 토목건축회사는 한일합자의 한일토건회사, 한국인 명의를 빌려 사용한 시키구미(志파組), 일본인 청부업자 야마구치(山口太丘衛)등이었다.
    •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이때는 한국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경부철도의 부설공사에 한국인 토건회사들이 참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인철도가 일본의 토건회사에 의해 독점적으로 부설된 것과는 달랐다. 즉 대한국내 철도용달회사, 대한경부철도역부회사, 대한운수회사, 철도목석등물용달회사, 흥업회사, 경성토목회사, 경부철도특허회사, 부산토목합자회사, 경부철도경상회사 등이 각 공구에서 일본인 토건회사와 경합하면서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 그러나 철도공사가 진척되고 일본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한국인 토건회사들은 공사청부로부터 점차 배제되어갔다. 그리하여 1903년 5월경부터 일본의 토건회사들이 공사를 독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일본정부가 1904년 12월 경부철도를 1년 안에 완공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경부철도공사는 완전히 일본인 토건회사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의 토건업은 경부철도, 그리고 이와 동시에 건설이 추진된 경의철도의 건설공사를 통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들은 그 후 한국과 만주에서 대대적으로 실시된 항만 도로 청사 은행철도 등의 건설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일본이 한국과 대륙을 침략하는 첨병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 러일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을 맞아 일본은 경부철도를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밤낮없는 속성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1월 1일에는 일단 영등포로부터 초량까지를 개통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무리한 공사는 당연히 토지 수용과 노동자 동원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특히 구로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일본의 무자비한 토지약탈과 노동력 수탈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다. 아래에서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 다. 토지 수용에 대한 반발
    • 일본측은 경부철도를 부설하면서 한국정부에 대해 최대한 넓은토지를 요구했다. 일본의 속셈은 철도 정거장 내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창고와 상점 등을 설치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적 침략기지로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정거장 한 곳 당 20만평, 선로용지로 폭 24미터의 용지를 달라고 했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경부철도가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를 연결하는 세계의 간선이기 때문에 이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일본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해 한국의 여론은 비등했다. 황성신문등은 사설을 통해 일본이 경부철도를 통해 일본인을 한국의 구석구석에 심으려 획책한다고 비판하였다. 한국정부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철도 수용지를 답사하고 보상가액을 산정하였다. 그 중에서 구로지역을 포함한 경기도(시흥, 과천, 광주, 수원, 진위, 양성 등)의 토지 보상가액은 1평 당 논 상품 30전, 중품 21전, 하품 12전, 밭 상품12전, 중품 8전, 하품 4전이었다.
    • 한국과 일본은 줄다리기 끝에 영등포와 같이 도회지에 인접한 정거장은 4만여 평, 기타 시골의 중소 역은 3만여 평, 선로 용지는 폭18미터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따라 경부철도에 범입(犯入)된 전답의 면적은 269만 7천 평이었고, 그것의 보상가액은 45만 6천 7백여 원이었다. 토지소유 관련자는 1만여 명에 달했다.
    • 그런데 한국정부는 토지보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정부는 토지와 가옥 및 분묘의 보상가로서 27만 6천여원을 경부철도주식회사로부터 연 6%의 이자로 빌리기로 하였다. 정부가지급한 보상가액은 1평 당 7.6전 꼴로서 당초 예정가액 17전의 2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철도연선에서는 집단적 시위와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구로지역이 포함된 영등포 일원에서도 정거장 부지와 일본인 소유지가 관내 경지의 반을 넘어 군 전체가 곧 일본의 영토가 될것이라는 우려가 자자했다.
  • 라. 노동력 수탈에 대한 저항
    • 경인 경부철도의 부설은 일본의 토건회사가 담당하였다. 이 회사들은 철도공사에 필요한 방대한 수의노동자를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강행하는 철도부설공사에 보통의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응하지 않아 사역에는 강제와 폭력이 난무하였다. 한국의 노동자 농민들이 피로써 항거했음은 물론이다. 구로지역은 이러한 민족모순의 핵심지였다.
    • 경부철도를 기공한 당시 토공의 하루 임금은 일본인 60전, 한국인20전, 갱부의 그것은 일본인 90전, 한국인 30전이었다.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3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마저 천부장(千夫長)백부장 십장(什長)등의 중간관리자가 2-3 전씩 착취하여, 노동자의 손에 남는 것은 10-16전에 불과했다.
    • 철도 부설공사가 착수된 직후부터 구로지역에서는 토지보상가와 노동임금이 싸다고 하여 폭동이 빈발했다. 일본의 토건회사인 시키구미(志파組)가 시공하고 있던 시흥 부근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중상을 입은 자가 속출하였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1904년 7월 2일부터 철도연선에 군율을 반포하고 마을마다 연대책임을 지워 철도를 보호하도록 강요했다. 철도공사를 방해하거나 철도에 해를 끼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철도연선주민의 반일운동은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 중에서 1904년 9월 5일 구로지역(시흥과 영등포 일대 포함)에서 발생하였던 대규모 민요(民擾)는 한국인 군수 부자(父子)와 일본인 2명을 살해하는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민요는 철도노동자를 조달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일본과 이에 굴종하여 연선주민들을 괴롭힌 한국인 군수에 대한 연선주민들의 원한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었다.
    • 구로지역에는 1904년 7월부터 철도공사에 필요한 역부(役夫)를 모집해 달라는 일본 토건회사의 요구가 빗발쳤다. 성화에 못이긴 수천명의 군민들은 동년 7월 9일 군청에 모여 이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민요를 우려한 군수는 타읍의 예에 따라 시행하겠다고 군민을 설득하여 해산시켰다.
    • 그후 시흥군수는 역부의 수를 30명으로 감하여, 각 동집강(執綱)에게 마을마다 1명씩 차출하도록 지시했다. 역부에 드는 비용은 마을이 공동으로 부담하도록 했다. 그 액수는 많으면 3천 수백여가량이었고 적으면 1천 5백여 가량이었다. 이는 동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더구나 군수가 역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수뢰하였다거나 서기들이 임금을 착복했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다.
    • 군민들은 1904년 9월 4일 군수의 비행을 성토하는 사발통문을 돌려 다음날 한천교(寒川僑)에 집결할 것을 결의했다. 주모자는 일직리(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일대)에 거주하는 전주사(前主事) 민용훈(閔用勳)이었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역부모집시의 부정을 성토하기 위해 한천교에서 집회를 갖는다는 것이었는데, 만약 불참하는 동(洞)이나 호(戶)가 있으면 훼파수속(毁破受贖)할 것이라는 협박문도 들어있었다. 이때 사발통문이 전파된 동리는 다음과 같았다. 광명리(현재의 광명시), 안양리(현재의 안양시), 박달리(현재의 안양리), 일직리, 자경리(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일부), 소하리(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안현리(현재의 안양시), 율전리(현재의 광명시 하안동), 와우피리(현재의 당산동), 원지목리(현재의 도림동), 구로1리(현재의 구로동), 양평리(현재의 양평동), 독산리(현재의 독산동), 봉천리(현재의 광명시 광명동), 성화대리(현재의 상도동), 가리봉리(현재의 가리봉동), 문교리(현재의 독산리), 아방리(현재의 광명시 광명6동), 노온곡리(현재의 광명시 광명6동), 노온사리(현재의 광명시 광명6동), 가리대리(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파성리(현재의 광명시 철산동), 난곡리(현재의 신림7동), 상도리(현재의 상도동), 사촌리(현재의 영등포동 일부), 양진리(현재의 당산동),번대방리(현재의 대방동), 신길리(현재의 신길동), 상방하곳리(현재의 신길동), 하방하리(현재의 신길동), 영등포리(현재의 영등포리), 중종리(현재의 영등포동) 등 43개 동리였다.
    • 사발통분을 받은 각 동 집강들은 이튿날 매호당 1인을 차출하거나 동리 대표 및 사람을 인솔하고 직접 참가하였다. 다만 양반촌인 자경리(自京里)는 참가하지 않았다. 한천교 집회에서 충훈부(忠勳府)에 사는 유학(幼學) 성우경(成禹慶)이 역부모집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자 삼막동(三幕洞)에 사는 양인 하주명(河周明)이 나서서 시흥군수와 성우경이 부동(浮動)하여 협잡을 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반박하자 양자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민용훈, 성우경, 하주명 등은 관아에 가서 재판을 하자며 읍으로 향하자 중민(衆民)이 이들을 따라나섰다. 오후 3시 쯤 군아(郡衙)에 도착한 중민들은 군수의 입회 아래 언쟁을 벌였다. 그때 군아에는 군수가 도움을 청해 불러들인 일본인 석공(石工) 10여 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언쟁 중에 갑자기 장검과 철봉을 휘두르며 중민을 공격하였다. 그 바람에 광명리에 사는 민검석(閔검石)이 두개골과 어깨를 맞아 주상을 당하고(동년 9월 9일에 사망함), 삼막동의 하주명이 귀를 베이고 머리에 돌을 맞아 기절하고, 성화도리의 동몽(童蒙) 1인, 신도림의 상제(喪制) 1인, 봉천리의 감학주(金學柱), 아방리(阿方里)의 김복성(金卜成), 윤맹분(尹孟分), 김순필(金順必) 등이 부상을 입었다.
    • 급습을 당한 중민들은 문밖으로 밀려났다가 돌을 던지며 다시 돌진해 들어가 군수 박우양(朴禹陽)과 그 아들을 죽이고 관사와 서리(胥吏)들의 가사집물(家舍什物)을 부수었다. 그리고 도망가는 일본인을 추격하여 토시나리(俊成市次)와 히메노(姬野愛五郞)를 타살하였다. 여기에 앞장선 자는 피살당한 민검석의 조카인 민대개(閔大介)와 그 형 민준겸(閔俊兼), 광명리에 사는 이필봉(李必奉), 김자근봉(金自斤奉), 박점석(朴占石), 배우성(裵又成), 박치운(朴致云), 김길보(金吉甫) 등이었다. 군아를 박살낸 중민들은 일단 해산했으나 민용훈 등은 9월 6일에 광명리에서 다시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43개 동집강의 연서(連書)로 군수의 죄상 10여개 조를 열거한 소장(訴將)을 만들어 관찰부에 투정(投呈)하였다.
    • 한국정부는 민요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순사를 파견하고 9월 16일에는 안종덕(安鍾悳)을 안핵사(按핵使)로 파견하여 자초지정을 조사하도록 했다. 한편 일본 공사관을 동대문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중에서 1개 소대를 급파하고 집강과 농촌 지도자를 체포하여 헌병주재소에 수감하였다. 9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계속된 안핵사의 문초에서 위와 같은 사건의 경위가 밝혀졌다. 민요에서 주동적 역할을 했던 민용훈, 성우경, 하주명, 김원록, 민대개, 민준겸, 김길보, 이필봉, 김자근봉, 배우성, 박치운 등이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았다.
    • 구로지역의 민요는 철도부설 과정에서 노동력 수탈을 자행한 일본과이에 기생하여 협잡을 부렸던 지방관들에 대한 연선주민의 저항을 보여준 전형적인 예이었다. 이러한 연선주민의 투쟁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착종하는 가운데 전개된 반침략 반봉건운동의 선봉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마. 경부철도의 국유화
    • 러일전쟁을 전후까지 일본이 한국에서 부설한 철도는 경인 경부 경의삼마(삼랑진-마산) 철도였다. 그런데 이런 철도들은 성립배경과 소유관계를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수영업도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경인철도는 미국인 모스에게 부설권이 주어졌던 관계로 철도재료가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었고 철도경영방식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 민간식이었다. 경부철도는 일본의 특허회사로 출발하여 러일전쟁을 계기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국책회사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본식의 운영방식을 책하였다. 경의 삼마 철도는 부설 목적 자체가 군사용이었기 때문에 소유자가 일본 육군이었고 경영방식도 군대식 관청식이었다.
    • 이와 같은 철도의 불통일성은 일본의 일사불란한 한국 침략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한국철도의 소유권과 경영방식을 통일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1906년 3월 사이 온지(西園寺) 수상은 철도국유법안과 경부철도매수법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혹카이도로부터 규슈에 이르는 일본의 간선철도와 한국의 경부철도를 일본정부가 매수하여 경영할 것을 제안하였다. 오쿠라대신(大藏大臣) 한야(阪谷芳郞)도 이제부터의 전쟁은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판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일본의 산물을 한국 및 중국에 최대한 신속하고 저렴하게 수출하기 위해서는 철도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만주의 철도까지도 일본의 철도망의 일환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정부는 1906년 7월 경부철도를 매수하여 경의 마산 철도와 함께 한국통감부에 직속시켰다. 그 목적은 한국에서의 철도 각선의 관리를 통일하고 운수교통의 민활을 꾀하여 일반 경영상 및 군사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한국통감부가 한국의 철도망을 일률적으로 장악한 것은 한국을 일본자본주의의 일환으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일본의 국가권력이 침략과 수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바. 일제하의 운수영업
    • 일제하의 한국철도의 운수영업은 경인철도에서 살펴보았듯이 1930년대 중반을 경계로 하여 크게 변하였다. 전반기에는 쌀, 조(조), 석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반면에 후반기에는 석탄, 시멘트, 광석, 금속, 기계, 군수품 등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1930년대 중반을 경계로 하여 식량 수탈 제일주의로부터 자원약탈과 군수공업화 우선주의로 전환되어 광공업품의 유통이 농산품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 그런데 철도화물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쌀, 조, 석탄, 시멘트, 철광석 등의 유통경로와 수송방향은 한국경제의 식민지적 기형성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한국미는 원래부터 일본의 식량부족을 메우기 위한 농산물로써 각광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1925-19년에는 생상고의 14%, 1930-40년에는 46%가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이출미의 대부분은 철도를 통하여 운반되었다. 그 경로는 대개 산출지-철도-근접항구-해운-일본의 형태였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충북 · 경북 · 경남은 경부선-부산항, 전북 · 전남은 호남선-목포항 · 군산항, 충남 · 경기는 경부선-인천항, 평북 · 평남 · 황해는 경의선-진남포항의 방향이었다. 이처럼 이출미의 수송이 지역적 분산성을 띤 것은 철도는 근거리를, 해운은 장거리를 이용하는 것이 운임면에서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국미의 철도 직통수송에 대한 할인운임제도가 실시된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출미의 수송이 경부선과 경의선을 통하여 부산항에 집중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즉 생산지-철도-부산항-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일본철도-소비지의 직통로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이는 곧 철도가 해운을 제치고 한국미의 장거리 대량 수송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만주산(灣洲産)의 조는 쌀의 이출을 메꾸어주는 대용식량으로 상용되었다. 그리하여 쌀의 이출이 격증하는 1920년대부터 만주조는 경의선 · 경부선 · 호남선 · 경인선 등을 통하여 전국의 소비지에 산포되었다.
    • 석탄은 일제시대 전반을 통하여 철도화물의 10%를 차지할 만큼 중요하였다. 그것의 유통경로는 일본 조선 만주의 수급관계하에서 형성되었다. 즉 만주산 석탄은 경의선 경부선을 통해 평양 진남포 서울, 대구 등의 대도시와 철도연선으로 운반되었고, 한국산 무연탄은 만포선-지남포항, 함경선-청진항과 인천항-경인선-서울의 경로를 택했다.
    • 1930년대 중반부터 화물의 대종을 이루었던 시멘트와 철강은 한국북부의 광산지대와 중공업 도시 및 일본으로의 이출항이 발착지였다. 즉 시멘트는 함경선-원산항, 경의선-지남포항, 철광석은 경의선 · 만포선 · 평원선-진남포항 겸이포, 함경선 · 혜산선-원산항이 기본 경로였다.
    • 구로지역의 화물수송은 대체로 위와 같은 전체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즉 경부선과 경인선을 통해 서울에 집산하는 화물의 일부가 구로지역에 산포되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의 구로지역은 아직 한촌(寒村)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화물과 여객의 수송에서 괄목할 만한 것은 없었다. 오류동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구로지역의 객화(客貨)수송의 실태는 경인철도의 항을 참고하기 바란다.
  • 사. 해방후의 경부선
    •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국철도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 하는 것은 경인선의 부분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철도 전체에 관련된 사항은 생략하고 경부선의 운영에 관련된 사실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철도가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한지 1년여가 지난 1946년 5월 20일 서울-부산 간에는 특별급행열차 조선해방자호가 운행되었다. 해방의 기쁨을 열차에 실어 남북을 누볐던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1946년 9월 23일 철도 종사원들이 좌익과 연합하여 총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철도운행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파업은 일주일 정도 지난 후 해결됐지만 정정의 불안과 함께 해방공간에서의 철도운행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 미군정청의 교통부는 1947년 2월 1일 전국의 열차시간표를 개정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철도는 해방전의 80%정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민족과 국토가 분단된 사실을 감안하면 빠른 회복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자 철도는 또 다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정부는 재빨리 전시수송체제로 전환하고 수송본부를 설치했다. 정부가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후퇴하자 1950년 8월 18일 수송본부도 부산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철도의 복구가 진척됨에 따라 1950년 10월 8일 부산-서울간에 철도 운행이 완전히 재개되었다.
    • 6.25전란은 앞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철도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전화(戰禍)가 걷혀가자마자 철도의 복구와 열차 운행의 정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55년 8월 15일 서울-부산간에는 특급열차 통일호가 운행되기에 이르렀다. 통일에의 염원이 열차의 이름에도 반영된 것이다.
    • 전쟁의 상처가 아물면서 열차운행은 개선되어갔다. 특히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경제재건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이는 철도망의 확장과 열차운행의 개선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1962년 5월 15일에는 특급 재건호가 6시간 10분만에 서울-부산을 주파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재건이라는 열차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철도는 경제개발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1966년 3월 21일에는 서울-부산 간에 화물열차 수출호가 처녀 운행을 시작했다. 수출제일의 구호가 열차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던 것이다.
    • 1966년 7월 21일 서울-부산 간을 특급열차 맹호호는 5시간 45분대에 주파했다. 당시 월남전쟁에 파견된 부대의 이름이 맹호였다는것을 생각하면 철도의 운행이 세태를 얼마나 정확하고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열차의 운행속도가 빨라지면 질수록 경제성장의 속도도 그만큼 빨라졌다.
    • 1969년 2월 10일 서울-부산 간에는 특급열차 관광호가 운행을 개시하였다. 이 열차는 그 후 개량을 거듭해 서울-부산을 4시간 45분에 주파하는 위업을 이룩했다. 이 열차는 나중에 새마을호로 계승되었다. 1970년대를 새마을운동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향수와 함께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열차인 셈이다.
    • 경부선의 중요성이 강화되고 열차운행의 개량이 점점 더 필요하게되자 정부는 철도 그 자체의 운영체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전철의 도입이다. 1970년 11월 25일에는 경부선의 전철화를 위한 조사와 측량이 착수되었다. 그 후 밤낮없는 공사를 거쳐 전철공사는 준공을 보았다. 현재 서울과 수원 사이에는 이미 전철이 운행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철도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고속전철의 부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2000년대 초입에는 서울과 부산을 2시간 30분만에 주파하는 고속전철이 운행되게 될 것이다.

전철

경인선과 경수선

정부는 1955년 이래 매년 증기기관차를 디젤기관차로 대체하여 많은 연료를 절약해왔다. 유동연료를 생산하지 못해 매년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여 연료유를 수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형편을 감안하면 이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고, 근본적인 해결은 철도동력의 전화(電化)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막대한 동력자원을 소비하는 철도가 최소한의 동력자원으로 최대한의 수송을 수행해낸다면 국민경제와 민간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대단히 큰 것이다. 철도의 전화는 철도동력비를 대폭 절약하는 동시에 수송효율을 증강하는 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다. 철도의 수송능력은 열차 당 차량편성 수와 운전 속도에 의해 결정되는데 전철은 고빈도 고속도 운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사면에서도 탁월한 운전을 해냄으로써 디젤보다 수송능력을 40% 이상 증가시킬 수 있다. 에너지 절약의 면에서 보면 디젤보다 전철은 에너지 소비를 25%정도 감소시킬 수 있다. 또 에너지 자원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전철은 전기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석유만이 아니라 수력원자력 등 비교적 값싼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다. 전발전량의 50%를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전철의 경제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전철은 서비스 환경의 개선에서도 발군의 효과가 있다. 매연과 소음을 감소시키고 짧은 시간내에 고빈도 고속도로 대량 수송을 가능케 하는 전철이야말로 높은 수준의 교통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1970년 6월 수도권 고속전철계획을 확정하고, 7월의 한일 각료회담에서 일본국과 함께 기술조사를 시행할것에 합의했다. 그리고 1971년 2월 24일 한일양국은 수도권 전철화용역를 협의했다. 이에 따라 1971년 4월 7일 수도권 전철 착공사가 마침내 착공되었다.


경인지역의 발전은 당연히 구로지역의 인구밀도를 조밀하게 만들고 이것은 또한 새로운 교통수요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1986년 1월 19일에는 오류동의 선상역사가 신축 준공되고, 1988년 1월 10일에는 온수역사가 신축 준공되었다. 온수역은 오류역과 역곡역 사이에 위치한 역으로서 이 지역의 승객이 폭주함으로써 신설된 역이었다. 그 후 구일역도 신설되었다. 서울-수원 복복선도 1981년 12월 23일 개통되었다.


정부는 경인선의 교통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경인선의 3복선화 공사를 착수했다. 그리하여 1991년 11월 23일 구로-영등포 간의 1단계를 개통했다. 이로서 57회의 열차가 신설되어 운행은 종래의 802회로부터 859회로 증가했다.


정부는 지금 경인선의 복복선화 공사를 벌이고 있다. 1991년 11월23일 착공하여 1998년에 완공될 예정인 이 계획은 구로-인천 27.0킬로미터를 복선화화여 1일 열차 운행 능력을 288회에서 576회로 증가시킬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출퇴근 때의 운행 시격도 3분에서 2분으로 단축되어 경인간 및 수도권 전철의 교통난 완화에 크게 기여할것이다. 총 투자비는 4,700억원이다.

지하철 제2호선

구로 지역의 동쪽 끄트머리 도림천(道林川)을 따라 지하철 제2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대체로 구로공단역으로부터 신도림역 사이가 구로구에 속하는 구간이다. 제2호선은 시청으로부터 을지로를 통해 화양동, 잠실, 강남, 영등포, 신촌, 아현동을 거쳐 시청에 이르는 46.5킬로미터의 순환선이다. 문자 그대로 서울의 중심지역을 일주하면서 동서남북을 모두 연결해주는 황금노선인 것이다.


제2호선의 예정노선이 결정된 것은 1975년 7월 9일이었다. 그리고 제1차 건설사업(기지-잠실-영동-구로)이 착공된 것은 1978년 3월 9일, 전구간이 개통된 것은 1984년 5월 22일이었다. 노선확정으로부터 10년만의 쾌거였다. 이로써 서울의 여객수송난과 구로지역의 교통난은 크게 개선되었다.


구로구내의 제2호선 역은 구로공단역, 대림역, 신도림역 등 3곳이다. 구로3동에 위치하고 있는 구로공단역은 중소공업이 밀집해 있는 수출산업 지역인 구로공단에 인접해 있어서 근로자와 회사원들의 출퇴근에 많은 편익을 가져다 준다. 구로공단역 부근에는 한국노총근로자 혼수품센터, 신영전기, 수출산업공단, 아남정밀생산기술연구원 등의 산업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대림역은 구로6동에 자리잡고 있다. 인근지역에는 럭키아파트, 우성아파트, 이화아파트, 구로구청 등 주거시설과 행정시설이 밀집해 있다. 신도림역은 신도림동에 위치하고 있다. 지하철 제5호선, 국철인 경인선과 경부선의 환승역이기 때문에 서울의 지하철 역중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라고 할 수있다. 주변에는 대성산업, 동아건설산업, 기아자동차출하장 등의 산업시설과 우성아파트 등의 거주시설이 밀집해 있다. 지하철 제2호선의 통과로 인해 구로구 동부지역은 빠른 속도로 쾌적한 거주공간으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지하철 제5호선

지하철 제5호선 중에서 구로지역을 통과하는것은 신도림역으로부터 도림천을 따라가서 경인로와 안향천을 건너 양천구청에 이르는 구간이다. 구로구내에 위치한 제5호선 역은 도림천역이다. 이 역 주변에는 대우제강, 한국타이어공업, 태진기계서원산업 등의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고, 우성아파트 등의 주거시설도 착착 들어서고 있다.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곳은 서울 서남부의 주거지로 탈바꿈할 전망이다.

지하철 제7호선

지하철 제7호선은 도봉(道峰)-건대(建大)-고속터미널-상도(上道)-광명(光明)-온수(溫水)를 잇는 총연장 45.6킬로미터의 신설노선이다. 1990년에 착공하여 1996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제7호선에는 41개소의 정거장과 2개의 차량기지가 설치될 예정이다. 제7호선은 서울 북서부의 주택단지로부터 서울의 서부지역을 지나 강남지역을 경유하여 광명시까지 연결되는 노선으로서 강남북의 대량 수송수요를 원활히 처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하철 제7호선 중에서 구로지역에 해당하는 곳은 총신대입구역-구로역-안양천주변-온수역 구간이다. 이 주변은 영등포의 상업지역, 구로동의 공업지역, 안양천변의 주거지역, 온수역 부근의 농촌취락지역등이 교차하고 있다. 이 지하철이 개통되면 연선은 편리한 주거지역으로 재편될 것이다.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교통행정과
  • 전화번호 02-860-2451
  • 콘텐츠수정일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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