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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편제의 변화

모든 행정구역이 그렇듯이 구로구지역도 시기에 따라 무수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구로지역은 한강의 지천인 안양천변에 위치하므로 신석기시대 이래 인간 거주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국가권력을 만들어 통치수단으로 행정력을 구사하기 시작한 이래 구로지역은 항상 특정한국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득한 고대시기의 역사는 그 자료의 영성함으로 인해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삼국시대이후 조선시대까지는 각종 지리지나 연대기에서 나타나는 자료를 통해 구로구지역의 행정편제의 변화를 더듬어 갈수 있다.근대적 행정체계가 확립된 일제강점시기와 해방이후 구로지역의 행정체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다 분명하게 기록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겠다.

전근대시기의 행정구역 편성의 원칙은 요즘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는 것이다.이는 인간의 생활공간이 산과 강,하천 등을 경계로 분리된다는 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행정구역 경계설정 원칙이었다. 그러나 전근대시기에서는 산천을 경계로 삼는 것 외에도 견아상입(犬牙相入)을 원칙으로 행정구역을 정하기도 했다. 즉 행정구역을 마치 개의 윗니가 아랫니 사이로 쑥 들어가 박히고 아랫니는 또 윗니 사이로 들어가서 서로 엇물리게 구획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설정한 당시에 확립된 원칙이었는데,한 지방관이 반역을 도모했을 때 인접한 다른 고을에서 공격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정구역 설정의 원칙은 조선왕조 태종조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정편제는 식민지시기인 1914년의 군현 통폐합당시에 정방형 또는 장방형과 같은 현재의 군현 구역 획정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나라 행정구역획정의 원칙이 이와 같았으므로 구로 지역도 시기에 따라 행정편제의 변화가 매우 다양했다. 구로 지역의 행정편제를 일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로지역 행정편제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구로구의 행정편제는 1980년 구로구 설치가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기(轉機)로 기록될 수 있다. 구로구 설치이후의 또 한번의 큰 변화는 말할 것도 없이 1995년 구로구에서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 동지역이 금천구로 분리된 사건이다.

본절에서는 일단 구로구 설치 이전시기와 이후시기를 크게 구분하여 현재 금천구에 편입된 지역이라 할지라도 불가피한 경우에는 함께 언급하도록 한다.

구로구 설치이전의 행정편제

현재 구로구지역은 안양천을 경계로 크게 동서로 나뉜다. 안양천 동쪽지역은 구로동, 신도림동, 가리봉동이며, 안양천 서쪽지역은 개봉동, 고척동, 오류동, 궁동, 항동, 천왕동, 온수동이 있다.전근대시기에는 대부분 산천(山川)을 경계로 행정구역을 정했기 때문에 구로구 설치 이전 안양천 동쪽지역과 서쪽지역은 전혀 다른 행정편제하에 놓여있었다. 대체로 안양천 동쪽지역은 금천현, 시흥군과 영등포구 지역이었으며, 안양천 서쪽지역은 부평도호부와 부천군에 소속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구로구가 독립된 행정단위로 설정되기 이전의 행정편제는 이 두 부분을 나누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가. 전근대의 행정편제

가) 안양천 동쪽지역 (구로동, 가리봉동, 신도림동)

삼국시대 안양천 동쪽지역의 구로지역은 원래 백제땅이었으나 고구려가 합병하여 잉벌노현(仍伐奴縣:뻗어가는 땅이라는 뜻)으로 삼았다. 그 뒤 통일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 한 후 신문대왕에 구주세(九州制)가 정비될 때 한산주(漢山州)에 속(漢州)로 바뀔 때 잉벌노 현은 곡양현(穀壤縣)으로 바뀌고, 율진군(栗津郡)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경덕왕 16년의 행정구역개편은 과거 순 우리말로 된 지명을 한자의 음이나 훈을 따서 여기에 해당하는 한자음으로 고친 것이었다. 예컨대 독바위라는 우리 지명을 옹암(饔岩)이라고 고치는 식이었다. 이에 따라 잉벌노현이라는 순 우리식 지명도 곡양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고려 건국 이후 태조 23년(940)에는 이 지역을 금주(衿州 혹은 금주)로 고쳤으며, 금양(衿陽)으로 별칭하기도 하였다. 고려 성종 14년(995) 도제(道制)를 실시하여 지방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편할 때, 이 지역은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되었으며, 동시에 금주를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이 지역을 시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조정에서 시흥이라는 별호(別號)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목종 8년(1005)에는 단련사를 혁파하였으나, 현종 9년(1018)에는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를 돌입하여 지방제도를 크게 개편 정비함에 따라 개성과 가까운 지역에 경기도를 설치하였고, 경기도는 개성부를 중심으로 10개현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 구로지역은 경기 10현 중의 하나인 수주현(樹州縣)에 속하게 되었다. 문종 23년(1069) 정월에는 경기지역을 크게 확장하는 행정조치가 있었으며, 명종 12년(1182)에는 이 지역에 감무(監務)를 두어 통치하였다.

조선왕조 건국이후 안양천 동쪽인 금주(衿州)의 행정편제는 초기에 상당한 변화를 경험한다. 태종 13년(1413) 10월 15일 경주, 전주와 같이 종2품 부윤이 배치된 부(府)와 정3품 목사가 배치된 목(牧) 이외에는 주(州)라는 명칭사용을 금지하는 지방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태종 13년 지방제도 대개혁은 그 이후 조선왕조 지방행정 제도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므로 자세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본떠서 인주(仁州)나 괴주(槐州)처럼 지관(知官)이 행정관으로 있는 자리에도 주(州)를 붙여 불렀으며, 금주(檎州)처럼 감무(感務)가 행정관으로 있는 군현에도 주를 붙여서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행정관의 관리체계가 혼효되어 있던 상태를 행정관의 품계에 따라 위계를 분명하게 하여 주부군현(州府郡懸)의 체계를 확립한 것이 바로 태종 14년의 지방행정제도 개편의 주된 내용이었던 것이었다. 즉 각도의 부관(俯官)은 도호부로 고치고, 감무(監務)는 현감(縣監)으로 고치며, 무릇 군이나 현에 주(州)자가 든 고을은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쳤다.

이에 따라 금주가 금천으로 바뀌고, 행정관도 종6품관인 현감이 다스리도록 개편되었으며 태조 14년 9월8일에는 금천 과천을 다시 분리하였고, 같은 해 윤9월 24일에는 금천현을 또 다른 이웃고을인 양천(陽川)과 합하여 금양(衿陽)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현의 합병조치도 1년만에 태종16년(1416) 8월 30일에 다시 금천과 양천을 분리하고, 비로소 금천이라하여 현감을 두어 다스렸다. 그 이후 금천현은 오랫동안 동일한 행정체계아래 놓여있다가 정조19년(1795) 윤2월 1일에 금천현의 지명을 시흥현으로 개칭하게 된다. 이로써 종 6품관인 금천현감이 종 5품관인 시흥현령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이 때의 승격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능인 현릉원(顯陵園)이있는 수원에 자주 행차함에 따라 서울에서 수원의 중간지점에 있었던 시흥지역의 번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안양천 동쪽의 구로지역은 헌종 9년(1843)에 편찬된「경기읍지(京畿邑誌)」의 시흥읍 방리조(坊里條)에는 동면(東面) 독산리(禿山里), 가리봉리(加里峰里)와 상북면(上北面) 구로리(九老里), 하북면(下北面) 번대방리(番大方里)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금천현의 위치를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의하면 확인하여 보면, 동쪽으로 과천현의 경계까지11리이고, 남쪽으로 안산군계까지 16리, 서쪽으로 부평부의 경계까지 17리, 북쪽으로 양천현의 경계까지 27리, 노량까지 23리, 서울까지 거리가 31리였다. 이러한 설명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금천군 곧 시흥군은 지금 안양천 동쪽의 구로 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나. 안양천 서쪽지역(고척동, 오류동, 개봉동, 온수동, 항동, 궁동, 천왕동)

안양천 서쪽지역은 삼한시대에는 54개 부족국가중의 하나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 이었다. 삼국시대인 백제초기 이 지역은 주부토(主夫吐)라는 지명으로 불려 졌는데, 온조의 형 비류가 경기 서해안 지역인 미추홀(彌芻忽)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비류백제의 영향력아래 놓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이후 이 지역은 고구려에 병합된 이후에도 여전히 주부토(主夫吐)라 불려 졌다. 주부토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을 차용한 것인데, 그 뜻을 상고해보면 님터 즉 주요지(主要地)란 뜻을 차자(借字)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주는 님(선생님, 아버님 등에서 나타나는 접미사), 부는 님의 ㅁ을 나타내고, 토는 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주부토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순 우리말 지명을 한자식으로 개칭할 때 장제군(長堤郡)이라 개칭하고, 한주(漢州)에 예속시켰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태조 23년(940)에 이 지역을 수주(樹州)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 14년(995)에전국에 10도제(道制)를실시하여 지방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편할 때, 안양천 동쪽의 금주(衿州)와 마찬가지로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되었으며, 이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목종 8년(1005)에는 단련사를 혁파하고, 현종 9년(1018)에는 지방관을 지주사(知州使)로 고쳐 인접지역과의 영속관계도 크게 확대하였다.

한편 문종 23년(1069)에는 양광도(楊廣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에서 41개 주현을 경기에 편입시켜 경기지역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이 때 수주도 경기에 편입되었다. 의종 4년(1150)에 수주라는 지명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고종 2년(1215)에는 안남도호부를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고쳤으며, 충열왕 34년(1308)에는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충선왕2년(1310)에 다시 부평부(副平府)로 강등되었다. 이지역의 지명으로 부평이라는 행정명칭을 사용한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며, 그 이후 이 지역은 고려시대 내내 부평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건국 이후 태종 13년(1413)에 지방제도 대개혁조치로 부평부는 다시 부평도호부 개정되었고, 태종 14년(1414)에는 부평도호부에 김포현이 합병되었다가 태종 16년(1416)에 다시 분리되었다. 부평도호부는 세종 20년(1438)에는 부평부에 소재하는 온천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호부에서 부평현으로 강등되었으나, 세종 28년(1446)에 다시 부평부로 복원되었다. 한편 연산군 11년(1505)에는 부평부에 거주하는 주민이 환자(宦者) 김순손(金舜孫)을 살해했다 하여 부평부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한 뒤인 중종 원년(1506)에 부평도호부로 다시 복원되었다. 부평도호부는 숙종 24년(1698)에는 장릉(章陵)방화죄인인 최필성(崔弼成)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현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숙종 33년(1707)에 다시 부평도호부로 환원되기에 이른다.

부평도호부 중에서도 구로구에 속해있는 안양천 서쪽지역은 수탄면(水呑面)지역이었다. 수탄면 지역에는 6개의 방(坊)이 있었는데, 추측건데 이 6개 방이 현재의 오류동, 개봉동, 온수동, 궁동, 천왕동, 고척동의 6개 마을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6개방의 인구는 가호(價戶)가 159호, 인구는 총 403명(남 274명, 여 129명)으로 부평도호부의 옥산면에 속해 있었다.

근세 이후의 구로구

가) 안양천 동쪽지역

한국사에서 개항은 아직 봉건적인 사회체제를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한 우리나라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구로지역은 서울과 당시 가장 중요한 개항장이었던 제물포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달리 급속한 사회변동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1895년에 편찬된「기전읍지(畿甸邑誌)」중 시흥읍지의 방리(坊里)를 살펴보면, 앞서 본 헌종 9년(1843)에 편찬된「경기읍지(京畿邑誌)」시흥읍 지에 비하여 구로리가 구로1리, 구로2리로 분화되고 있다. 이는 개항을 계기로 서울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사람과 상품이 늘어나면서 이 지역에 인구가 급증하고 촌락이 증가하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왕조 500년동안 군현제에 이해 유지되었던 지방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과 이를 뒤이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선정부는 1894년 6월 8일 내정개혁방안 강목(綱目) 5개조 26개항을 제시하였는 바, 그중 1조가 중앙정부의 제도 및 지방제도를 개정한다는 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정개혁방안의 구체적인 조항으로 부군현치(府郡縣治)는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를 적당히 통폐합하여 통치에 무방하도록 줄일 것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내정개혁방안에 따라 1895년 5월 26일 구체적인 개혁조치가 전문 6조의 칙령 98호로 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종전의와 군(郡)을 두는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였다. 요컨대 전통적인 지방제도인 8도아래 주부군현(州府郡懸)을 두고 지방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전국을 23개의 부(府)로 나누어 전국 337개의 군현을 23개 부의 관할하에 두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종래의 유수부, 부, 목, 대도호부, 군, 현으로 되어 있는 고을을 일률적으로 모두 군으로 삼고, 부에는 관찰사를 군에는 군수를 두어 행정사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구로지역이 속해있던 시흥현도 시흥군으로 바뀌고, 군수가 다스리는 고을로 변하였으며, 인접한 안산군, 과천군과 함께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경기도에 속해있던 시흥현이 경기도를 없애는 조치에 따라 인천부 관할로 편입된 것이다.

1895년 지방제도개편은 일인과 친일관료세력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의 지방제도 개편은 우리나라 행정제도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보다는 종전의 지방지배질서의 대한 교란을 통해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을 용이하게 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에서 지방제도가 개편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민중의 반발이 거셀 수 밖에 없었다. 지방제도개편 이후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인 낭인집단(浪人集團)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으며, 곧 이어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친일내각에 의해 새로 임명된 23개부의 관찰사가 신임군수들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고, 그 결과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면서 행정제도의 개편을 주도하였던 친일내각은 붕괴되었다.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경무청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용인에서 성난 군중에 붙잡혀 피살된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김병시를 내각수반으로 하여 들어선 친러내각은 단발령을 취소함과 아울러 1896년 8월 4일에는 을미개혁에 시도된 지방제도개혁을 전면 무효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23부제를 폐지하는 대신에 전국을 한성부와 13도로 나누는 재도로 다시 복구하였다. 이 때의 지방제도 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종전 8도제로 운영되었던 도제가 13도제로 확대된 것이다. 즉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제외한 나머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함경도는 남북으로 각각 분리하여 13도로 편성한 것이다. 다만 한성부는 5서(署)구역에 한성부를 두어 독립시켰다. 이 때 확립된 13도제는 현제에 이르기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다. 요컨데 현행 도제의 골격은 바로 이때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을미개혁때 인천부 소속이던 시흥군도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종전처럼 경기도 산하의 시흥군으로 환원되었다.

나) 안양천 서쪽지역

부평도호부에 속해있었던 안양천 서쪽지역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당시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부평도호부가 부평군으로 개칭되면서 이웃한 시흥군 등과 함께 인천부에 소속되었으나, 1896년 아관파천이후 다시 13도제로 지방제도가 복구되면서 경기도 산하의 부평군으로 바뀌었다. 이 때 부평은 도호부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군의로 정작하게 된다. 부평군은 당시 군(郡) 중에서 4등군에 속한 지역으로 15개면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현재 구로지역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수탄면과 옥산면 항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하의 구로지역(1910-1945)

가) 안양천 동쪽지역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같은 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6호를 발령하여 도의 위치 및 관할구역을 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 도청청사는 수원에 있다가 경성부로 옮겨졌으며, 이에 뒤이어 12월 7일 발령한 조선총독부령 53호에 의하여 구로지역이 속해 있었던 시흥군청의 위치도 시흥군 군내면 읍내리에서 하북면 영등포리로 옮겼다. 군내면 읍내리는 현재 금천구 시흥동지역이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영등포 지역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1911년 일제는 전통적인 조선왕조적 통치질서를 구현해 왔던 최말단 행정단위인 동리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통폐합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는 기존의 동리조직이 구래(舊來)의 조선왕조적 지배질서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총독부와 각종 행정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취해진 조처였다. 요컨대 식민지권력에 의해 효율적으로 주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왔던 촌락의 지배질서에 대한 개편작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시흥군의 동리 통폐합조치는 1911년 4월 27일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하북면(下北面)의 우와피리(牛臥陂里),번대방리(番大方里) 가 번대방리로, 개항이후 인구증가에 따라 분화되었던 상북면(上北面) 구로1리, 구로2리가 다시 구로리로 통합되었으며, 동면(東面)의 독산리, 문교리(文橋里)도 독산리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동리 통폐합 조치의 연장선속에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탈취한 이후 3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효율적인 대민통치를 위하여 지방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1913년 12월 29일 총독부령 111호 「도의 위치, 관할구역 및 부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령」으로 구체화되었다. 1914년 3월 1일에는 위령에 의하여 종전의 12부 317군으로 편성되었던 지방제도를 12부 220개군으로 개편하였다. 종전에 비해 192개군을 폐지하고 이웃 군에 통폐합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구로지역이 속해있던 시흥군은 종전의 과천군과 안산군을 편입시킨 대군(大郡)으로 탈바꿈하였다. 3개군이 통합된 시흥군의 군청소재지는 종전 시흥군 군청사가 있었던 영등포 그대로였다.

이러한 109개 군의 대대적인 감축조치와 아울러 같은 해 4월 1일에는 군 단위 밑의 하부행정단위였던 면에 대해서도 종전의 4,322개면을 2,251개면으로 통폐합하였다. 총 1,801개면을 감축하는 대대적인 감축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면사무소의 위치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안양천 동쪽의 구로리, 번대방리, 독산리, 도림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던 상북면, 하북면도 북면으로 통합되었고, 면사무소는 영등포리에 두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 1914년 서울의 외곽지역을 개편하여 경기도로 편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 후기 서울의 상업적 번영을 반영하였던 현재의 강북지역 경계인 도봉구 우이동 은평구 갈현동 등지, 그리고 한강변의 마포나 합정동 등지가 대부분 경기도의 은평면, 용강면 등지로 변경되어 버렸다. 조선왕조시대 발전과 번영의 상징이었던 서울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축소시키면서 조선왕조시대까지 발전과 성과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자 하는 조치였던 것이다.

서울 외곽지역의 축소와 함께 안양천 동쪽 구로지역이 속해있던 구로리, 독산리 등지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에 소속되었다. 반면 안양천 서쪽 구로지역은 후술하듯이 경기도 계남면 (고척리, 개봉면, 오류동)

일제는 1926년 4월 24일 경기도령 4호에 의하여 시흥군에 한해서 면의 통폐합을 다시 실시하였는데, 종전의 신북면을 쪼개서 그중 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의 4개동은 영등포 관할의 북면으로 붙이고, 사당리는 신동면에 붙여 신북면을 없애어 총흥군 북면에 속했는데, 당시 시흥군 북면에 포괄된 범위는 한강 남안에 걸쳐 동쪽인 동작리, 흑석리, 노량진리, 본동리, 번대방리, 신길리, 영등포리, 도림리, 당산리, 양평리, 구로리 등이있다.

한편 1917년에는 면제(面制)가 실시되었다. 즉 1917년 6월 9일 제령 1호 「면제」와 총독부령 34호 면제시행규칙 반포로 1917년 10월 1일부터 면제가 실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면제(面制)는 면의 사무범위 확정, 면직원의 정원과 급여, 지정면제도, 면수입의 종류와 그 세율을 규정한 것으로 조선왕조적인 통치질서를 식민지적 통치질서로 전환하기 위하여 시행된 것이었다.

1911년의 동리통폐합 조치에 이은 1917년의 면제의 실시는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의로 조선왕조의 지방통치제도는 중앙-주부군현(州府郡縣)-(면)-동리로 이어지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시대에도 면이라는 행정기구가 주부군현의 하위행정기구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율적인 행정기구라기 보다는 군현의 행정업무를 위임받아 처리하고, 행정서류의 전달 등의 업무만을 담당하는 보조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일반 주민들의 의견이 수렴되고, 이것이 군현의 수령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면은 적극적인 행정기구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면임(面任)이 대부분 평민이었던데 비해, 동리임인존위(尊位), 동장 등은 대부분 양반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일제가 면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하고 정리한 것은 일제의 행정체제를 조선왕조시대의 군현 중심체제에서 면 중심체제로 전환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면 중심체제를 확립한 것은 기존 군현-(면)-동리의 행정체계가 조선총독부의 행정명령에 대한 상당한 반발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저항을 무력화하면서 효율적으로 식민지 행정기구를 장악하기 위하여 면을 식민지 지방행정기구의 중심 기구로 부상시켰던 것이다.

1917년 일제는 면제시행과 동시에 일제는 지정면제(指定面制)도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즉 지정면이라는 것은 한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면으로서, 그 상황이 부(府)에 가까운 면에 한하여 이를 지정면으로 하고, 면장은 일본인을 임명할 수 있으며, 면장의 자문기관으로 도(道) 장관이 임명하는 상담역을 두는 것으로, 지정면으로 규정되었다. 즉 영등포리가 속해있는 북면을 쪼개어 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의 3개자리만을 독립시켜 영등포 면으로 삼은 것이다. 이와 같이 영등포리가 시흥군에서 독립된 영등포 면으로 승격된 것은 이 지역이 상공업중심지로서 일인들의 비중이 1/2 이상인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제는 1930년에는 지정면을 41개면으로 증가시켰다. 이후 이들 지정면 지역은 대부분 도시로 발달하였다.

이처럼 시흥군지역중 일인이 집중 거주하는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제외한 구로, 독산, 흑석, 노량진, 본동, 번대방, 도림 등의 동리는 시흥군 북면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1930년 12월에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이 때 지방제도 개편의 주요내용은 지정면 제도를 폐지하고 읍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즉 부와 면의 중간단계인 읍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읍제를 신설한 이유는 지정면 용어의 부자연성과 일본 본 토리의 시촌정제(市村町制)중에 정(정)에 해당하는 중간단계가 조선어에는 없었기 때문에 총독부 입장에서 조선의 지방제도를 일본 본토의 지방제도와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 신설된 읍과 과거 지정면의 차이는 면에는 자문기관인 면협의회를 두었는데, 읍에는 부의부회와 동일하게 의결기관인 읍회(邑會)를 둔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103호(1930.4.1자 반포)에 의거 영등포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8호에 의해 1914년 축소되었던 경성부의 구역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1934년 6월 20일 제령 18호 조선시가지 계획령의 반포로 경성시가지 계획을 재로 수립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의 경성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전역과 북면중에 상도천 우안지역, 도림천 우안지역, 동면중의 상도리, 김포군 양동면에서 안양천 우안지역(오늘날 양화동)등이 편입되었다. 이 구역확장으로 경성부의 면적은 종전 36.18㎢ 의 3.7배에 달하는 136㎢ 로 늘어났고, 인구도 종전 40만여명에서 23만여명이 늘어나 63만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후 경성부는 조례 6호로 용산, 동부, 영등포 3출장소를 설치하였고, 이에 따라 영등포 지역에 영등포출장소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였다. 또한 이때에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두고 동리명은 모두 일제식인 정(町)으로 바뀌었는데, 예컨데 동작리는 동작정으로, 번대방리는 번대방정등으로 바뀐 것이다.

1943년 6월 9일 일제는 총독부령 163호 경성부 구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을 반포하여 구제(區制)를 실시하였다. 이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인구로 인하여 서울이 100만 이상의 인구로 팽창한 데 따른 행정제도 개편조치였다. 이 개편의결과 종전의 4개 출장소(용산, 영등포, 동부, 서부)를 용산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그리고 도성내를 종로구와 중구를 설치하여 총 7개구를 두었다. 이로써 영등포구가 일제 말기에 본격적으로 출범하였다.

일제하 안양천 동쪽 구로지역은 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한 영등포지역이 지정면, 영등포읍, 영등포출장소, 영등포구로 행정구역이 변해간 것에 반해 해방당시까지 여전히 시흥군 북면 소속으로 남아있었다.
 

나) 안양천 서쪽지역

한일합방이후 안양천 서쪽지역의 구로구는 1914년전까지는 부평군 수탄면의 6개리와 옥산면의 항리였으나, 1914년 지방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인해 이지역의 행정편제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경기도는 2부 20군으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1913.12.29 공포)에 의하여 서해의 관문격으로서 발전하고 있었던 인천이 부(府)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원래 부평군에 속해있었던 행정구역에 대한 개편이 뒤따랐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부평군의 폐지와 부천군의 신설이었다. 부천군은 부평군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따서 명명되었다.

1914년 신설된 부천군의 행정구역은 15개면 148개리로 편성되었다. 부천군에 소속된 지역은 이전 부평군 지역이었던 석천면의 4개리, 항리를 포함한 옥산면의 4개리, 수탄면 6개리(오류, 고척, 개봉, 천왕, 온수, 궁리)와 상오정면의 5개리, 하오정면의 4개리, 주화곶면의 4개리와 과거 인천부의 구읍면, 서면, 남촌면, 조동면,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 주안면, 영종면, 용유면, 덕적면과 다소면 중에서 인천부에 속하지 아니한 지역과 그리고 강화군 중에서 신도, 실도, 모도, 장봉도와 남양군의 대부면, 영흥면을 통합하여 부천군 소속지역으로 삼았던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부천군은 종래 부평군의 행정규모와 같이 15개면으로 출범하였으나, 리의 수는 부평군의 64개리에서 84개리로 늘어나 대형 군으로 확대된 것이다. 부천 군지역은 당시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경인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으로서 자연스럽게 경인철도의 중간 기착역이었던 부천역(당시의 소사역)과 오류역 등 2개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역은 대부명칭은 계양산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이 산면에 소속된 17개 리가 소속되었다. 17개 리를 구체적으로 보면 오류리, 고척리, 개봉리, 천왕리, 은수리, 궁리, 항리, 표절리, 조종리, 벌응절리, 괴안리, 소사리, 범박리, 구지리, 상리, 중리, 심곡리였다.

한편 1931년 4월 1일을 기하여 일제는 다시 면의 명칭을 게칭하여 계남면을 소사면(素砂面)으로 개칭하였다.계양산 남쪽이라는 계남면 도심의 발전은 경인철도가 통과하는 소사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이 때에 와서 면의 중심 이름을 따서 소사면으로 개칭한 것이다.

부천군은 1936년 10월 1일 총독부령 제93호에 의하면 부천군의 다주면 토오하리, 구월리, 간석리, 십장리 등 4개리를 인천부에 편입시키면서 다주면을 폐지하고, 종전 15개면에서 14개면으로 축소 조정되었다. 또한 1940년 4월 1일에도 인천부의 구역확장에 따라 문학면 12개리, 남동면 9개리, 부내 면의 16개리, 서곶면의 12개리 등 4개면 49개리가 인천부에 편입되어,부천군은 다시 10개면으로 축소 개편되었다.

이후 부천군청은 소재지였던 소사면이 도시로 계속 발달해가자 1941년 10월 1일에는 소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계남면에서 소사면으로 명칭이 바뀌지 10년 6개월만에 소사읍이 된 것이다. 일제 말기 소사읍의 인구는 2만이상을 헤아리는 번성한 고을이었다. 안양천 서쪽의 구로지역은 부천군 소사읍이라는 행정편제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해방이후-1962년까지의 구로지역

가) 안양천 동쪽지역

해방을 맞아 미군청정은 일제의 의해 변경된 수도 경성부 명칭을 서울특별시로 고쳤으며, 1946년 10월 18일에는 미군정 법령 제106호에 의거 영등포 구역소가 영등포구로 변경되었다.

1948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는데, 이 때 경기도 시흥군 동면 전역과 북면의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와 경기도 고양군 수인면, 뚝도면, 은평면의 42개 동리가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이중 현재 안양천 서쪽 구로 지역인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 등 3개 동리는 영등포구에서 관할하게 된다. 이 때의 행정구역 확장은 광복후 최초로 확장한 행정구역으로 서울시의 면적과 인구에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이지만 동리명은 과거의 리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정부는 1949년 10월 1일에는 일본식으로 부르던 동명을 우리식으로 바꾸어 동작정, 흑석정이 모두 동작동, 흑석동으로 개칭되었다. 도림리와 번대방리는 1936년의 구역 확장때 그 일부만 편입되어 영등포구 도림동, 대방동이되었는데, 이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영등포구에 편입되지 않았던 지역도 여전히 시흥군 동면 관내의 도림리, 번대방리로 병존하고 있었다가 이 때 모두 영등포 관내로 편입되어 각각 합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동으로 불리우지 않고 그대로 리명칭을 답습하고 있다가 1950년 3월 15일 조례 10호 「서울특별시 동리명칭중 개정의 건」이 공포됨에 따라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등이 모두 구로동, 도림동, 신대방동(번대방리)으로 바뀌었다.

1949년을 기점으로 현재 구로구 구로동은 비로소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 구로동으로 편제된 것이다.

나)안양천 서쪽지역

해방을 맞아 도시지역의 인구 구성에 상당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도시 인구의 15%를 차지하였던 일본인의 본국 철수,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피하여 피난갔던 사람들의 유입, 그리고 북한에서 남쪽으로 월남한 인구, 해외동포의 귀국 등으로 도시지역에 많은 인구가 집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 5년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여파로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불가피하였다. 1953년 휴전이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점차 정상화되어가자 수도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경인국도와 철도사이에 위치한 소사읍 지역의 인구집중은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졌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여 1957년 1월 1일부터 17개리로 편성되었던 소사읍은 26개리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범박리에 신앙촌이라는 집단종교부락이 형성됨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이 확대되자 1957년 1개리가 추가되어 소사읍은 총 27개리로 편성되었다. 1961년 5.16 발발이후 인천시에 있었던 부천군청이 1962년 8월 소사읍 읍사무소 자리로 이전하였고, 읍사무소는 심곡동 근처로 이전하였다. 이 지역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서울특별시 편입시기(1963-1979)

안양천 서쪽지역이 1949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구로동을 중심으로 서울시 지역에 포함되었지만, 안양천 동쪽지역은 여전히 부천군 소사읍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된 때는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의해서였다. 1962년 11월 21일에 공포된 법률 1172호에 의거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 오교리, 소사읍 항리, 온수리, 궁리, 천왕리, 오류리, 개봉리, 고척리(하일, 도일리등)와 시흥군 신동면 및 동면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된 것이다. 이로써 현재 대부분의 구로 지역은 본격적인 서울특별시로서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 영등포구에 편입된 지역은 대부분 촌락으로 면적이 넓었으나.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 조치 법으로 종합행정사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로 이를 관할하는 출장소를 새로 10개소 설치하게 되었다. 영등포구 지역에는 관악출장소(시흥동, 독산동, 가리봉동 등), 오류출장소(오류동, 고척동, 개봉동, 궁동, 천왕동, 온수동 등)가 설치하여 관할하였다.

이 때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안양천 서쪽지역의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안양천 서쪽지역의 내역 안내
구분 편입지역 면적(㎢) 가구(호) 인구(명) 동리
영등포구 오류, 천왕, 항동, 온수, 궁, 고척, 개봉 17.38 3,267 15,909 7

한편 1968년 1월 1일에는 서울특별시 조례 491호에 의해 63년에 설치되었던 10개 출장소 중 망우, 오류, 양동,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으로써 구로지역은 영등포구의 직할로 편입되었다. 또한 1970년 5월 18일에는 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조례」를 반포하여 행정동이 조정되었다. 구로지역은 신도림동이 신설되고, 구로동이 구로1, 2, 3, 동으로 분화되었으며, 가리봉동과 시흥 1,2동 그리고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으로 개편되어 천왕동, 항동, 온수동 등이 법정동으로 명칭은 있으나 행정사무는 각각 고척, 개봉, 오류동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 7월 1일 법률2596호에 의거하여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됨으로써. 안양천 제방이 직선화되었는데, 그 결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일부가 영등포구 개봉동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일부는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가 반포되어 인구 100만명이 넘는 구에 대한 대폭적인 행정구역조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영둥포구의 독산동 일부가 관악구에 편입되는 대신, 관악구의 대방동, 신대방동의 일부가 영등포구 신길동에 편입된는 행정편제상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같은 날 서울특별시 조례 979호에 의해 동 명칭 및 구역이 조정되었고, 동 981호에 의해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이 변경되었다. 그 결과 신도림2동, 독산동, 시흥3동, 구로4동, 오류 2동이 신설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는 서울특별시 조례 1181호로 인구 3만명 이상의 동을 나누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 결과 가리봉 동이 가리봉 1,2동으로, 개봉동이 개봉1,2,동으로, 독산동이 독산1,2,동으로, 신림동2동이 대림1,2동으로, 구로1동이 구로1,5동으로, 구로4동이 구로 4,6동으로 분동되었다. 1978년 10월 10일에는 서울특별시 조례 1287호로 독산2동이 독산2,3동으로 고척동이 고척 1,2동으로 분동되었다.

이처럼 70년대 이후 구로 지역은 한국수출산업공단의 창설과 수출산업의 호황으로 꾸준하게 인구가 증가하여 행정동이 크게 늘었다. 이는 구로 지역이 바로 한국수출산업공단의 창설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로구 설치이전의 행정편제

구로구의 독립과 발전(1980-1994)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360호로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중심으로 발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수출공단이 입주한 영등포구의 남부지역에 구로구를 신설하여 이 지역을 관할하도록 결정하였다.

구로(九老)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아홉명의 노인이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평화롭게 살았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과거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행정지명으로 확정된 것은 이 지역이 서울과 인천간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60년대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였다. 특히 한국수출산업공단을 "구로공단"이라고 통칭하는 점에서 60년대 이후 한국 산업화의 상징적인 지역으로서 구로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지명으로 다가서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급격한 산업화과정에서 빚어진 노사간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갈등구조속에서 사용자편이 아닌 노동자편이 아닌 노동자편의 문화와 의식을 대변하는 지역으로서 구로지역이 갖는 상징성도 매우 중요했다.

이처럼 구로지역은 구로구의 창설이후에도 끊임없이 인구가 팽창하는 산업도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서울특별시가 대부분 금융, 소비도시인데 반하여 구로지역은 서울내에서도 가장 대단위 산업지대로서 한때 우리나라의 수출산업의 중심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한 사업이다.

신설 당시 구로구에 편입된 지역은 구로동, 가리봉동, 천왕동, 항동 및 신도림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수출산업의 급성장에 따라 구로구 관내의 행정동에 따라 구로구 관내의 행정동이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구로구가 신설된지 3개월만인 1980년 7월 1일에는 서울특별시 조례 1413호 「동사무소 설치조례」에 따라 가리봉 1동을 1,3동, 독산2동을 독산 2,4동으로, 시흥1동을 시흥1, 4동으로 개봉2동을 개봉2,3동으로 분동하였고, 198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1691호 서울특별시 동사무소 설치조례에 따라 시흥1동에서 시흥본동이 분화되었다. 또한 1985년 9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2015호 서울 특별시 동사무소 조례 중 개정조례로 분동 및 경계조정이 이루어져 독산본 동과 시흥5동이 신설되었으며, 1988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조례 158호로 구로 본 동이 신설되어 구로구 산하에는 총 30개동이 편입 되었고, 1994년 11월 1일에는 개봉본동이 신설되어 총 31개동이 되었다.

구로구 창설 15년이 되자 계속적인 인구증가로 구로구의 인구는 70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1994년 12월 22일 공포된 법률 제4802호(서울특별시 광진구 등 9개 자치구 설치 및 특별시, 광역시, 시도간 관할구역변경 등에 관한 법률)를 제정하여 구로구에서 금천구를 분리 독립시키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1995년 3월 1일에는 금천구가 창설되어 구로구지역중 가리봉동, 시흥동, 독산동지역이 금천구에 편입되었다. 이로서 현재 구로구는 신도림동, 구로 1,2,3,4,5동,가리봉동, 고척1,2동, 개봉1,2,3동, 오류1,2동, 수궁동의 총 15개동으로 구성되었다.

구로구의 행정기구

행정기구의 변천

구로구의 행정기구는 1980년 창설이래 인구증가와 행정편제의 변화에 따라 상당한 변화를 경험한다. 창설당시의 구로구의 직제는 4국 20과 58계 21개동이었으나, 그 후 효율적인 업무수행을 위하여 구의 직제가 계속 개편되어 현재 5국 1단, 32과 132팀, 1구의회사무국(3전문위원 3팀), 1소(4과 13팀), 15동 32팀으로 편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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